이야기舍廊/詩 읽기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취몽인 2020. 5. 18. 15:12

동시에 주문한 쉼보르스카 시집 두 권 중 좀 모자란다 싶은 책. 하지만 모자람의 원인으로 지목했던 번역 어휘와 의미 전달의 부족이 오히려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주는 여백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각기 다른 느낌을 전해주는 많은 시들이 있고
다 훌륭하지만 특별히 마음에 닿는 두 편을 아래에 남긴다.

굳이 표현하자면 객관적 존재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낳는 무의미성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까? 아니면 주체적 사물들의 진정한 목소리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해야 할까? 잘 모르지만 내겐 여러 생각을 낳는 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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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우리는 그것을 모래 알갱이라 부르지만
그에게는 알갱이도 모래도 아니다.
그는 이름이 없어 만족스럽다.
보편적인, 특별한,
스쳐 지나가는, 오래 남는,
잘못됫 것이든, 적당한 것이든.

우리가 보건 손대건 그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다.
만져지든, 보여지든 느끼지 않는다.
창턱에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일일 뿐 그의 고난은 아니다.
어디에 떨어지든 그에게는 똑같다.
벌써 떨어졌는지, 떨어지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창으론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
그러나 그 풍경은 자기를 못 본다.
색깔없이, 형태없이
소리없이, 향기없이
이 세상에서 그에게는 아픔도 없다.

호수바닥한테는 바닥이 없고
기슭에게는 기슭이 없다.
호수물은 젖지도 마르지도 않았고,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돌 둘레에
스스로 물결치는 소리에
귀먹은 파도는 낱개도 여러개도 아니다.

태양이, 지지 않으면서 지고
알아채지 못하는 구름 너머 숨지 않은 채 숨어 있는,
본래 하늘 없는 하늘 아래 모든 것.

분다는 이유 외에는 아무런 다른 이유 없이,
바람이 구름을 몰고 다닌다.

일 초가 지나가고
두번째 초
세번째 초
그러나 그것은 오직 우리의 삼 초일 뿐.

중요한 소식을 가진 사자같이 시간은 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비유일 뿐.
그의 서두름이 불러일으킨, 상상의 인물,
그리고 비인간적인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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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N 시에 도착하지 않은 것은
정확하게 시간 맞춰 일어났다.

보내지지 않은 편지로
너는 예고를 받았고

예정된 시간에 맞춰
너는 오지 않았다.

기차가 삼번 홈으로 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내렸지만,

출구로 나가는 인파 속에
내가 없어도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다.

황망함 속에
몇몇 부인네들이
급하게 나를 대신했고.

내가 모르는 사람이
한 여자에게로 달려 올라갔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당장.

우리의 입맞춤이 아닌
입맞춤을 둘이 교환할 때,
내 것이 아닌
트렁크가 없어졌다.

N 시에 있는 역은
훌륭하게 시험에 통과했다.
객관적 존재라는 과목의.

전체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세부적인 것은
정해진 선로 위를 움직인다.

약속된 만남조차
있었다

우리 현존의
범위 밖에서.

잃어버린
가능성의 천당에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얼마나 이 말들이 울리는지.


1997.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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