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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뜨거운 장판에 배 지질 때나 하는 생각
하자, 가 아니라
하면 할게, 라는 사람이
무조건 착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우리는 오늘에 이르렀다
사랑은 독한가보다
나란히 턱을 괴고 누워
<동물의 왕국>을 보는 일요일 오후
톰슨가젤의 목덜미를 물고 늘이진 사자처럼
내 위에 올라탄 네가
어떤 여유도 없이 그만
한쪽 다리를 들어 방귀를 뀐다
한때는 깍지를 끼지 못해 안달하던 손이
찰싹 하고 너의 등짝을 때린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즉흥이다
그런대로 네게 뜻이 될 만큼은
내가 자랐다는 얘기다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윗목 소쿠리에 놓여 있던
사과를 깎는다
받아먹는 너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진다
물러
무르면 지는 거라는데 말이지
언젠가 자다 깼을 때
등에 배긴 그 물컹이
갓 낳은 새끼 강아지였다며
너는 이제 와 소용없는 일을
오늘의 근심처럼 말한다
쓸데없다
비는 요동처럼 절구 찧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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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만드는 시인의 시집.
이름은 많이 들었다. 시도 몇 편 읽은 적 있다. 황현산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허수경시인이 또 그러했을 때 김민정이라는 사람은 그 장례의 당사자 같았다. 많이 슬퍼하고 안타까워 하던 모습을 여기저기서 한 동안 볼 수 있었다. 정작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본적 없는데. 그 밖에도 그녀의 이름은 시인들이, 시집들이, 시들이 유통되는 곳곳에서 들렸다. 그만큼 詩판에서 유명한가보다 생각한다. 시 세상의 골목길 같은 사람이겠거니 생각도 해본다.
시인이 관여한 시집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세상에 나온 시집 꽤나 읽었고 시인도 세상에 나온 시집 꽤나 간섭을 해왔으니 그럴 거라 생각힐다. 정작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시집을 펼쳐 뒷면에 편집자 등을 뒤져본 것도 자신의 시집을 혹시 스스로 편집 기획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詩들은 발랄 쉬크하다.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응큼하기도 하고 살짝 뒤집는 맛도 적당히 섞여있다. 세상을 비뚜루 보는 눈빛과 대놓고 하는 욕지거리 그리고 슬픔 같은 것들이 얼기설기 또는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수많은 시집들의 뚜렷한 목소리가 시집 여기저기 가시로 박혔지 않나 생각도 해본다.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문장들 사이로 스며나오는 자조 같은 말들. 시인은 뭔가 세상이 마뜩찮은 모양이다. 그래도 시들은 대부분 날카롭다. 방심하지 말라는 듯.
보통 시집 한 권에 실리는 시는 80여편인데 이 시집은 33편이 실렸다. 삼삼하지 않느냐 시인은 웃으며 말한다.
남의 시를 묶으며 시인은 스스로의 시를 그리워 했을 것 같다. 시집 안 날개에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결국 시 동네 뒷골목을 단단히 지키고 있어도 시인은 시에 목메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허수경시인이 말했다는 '시시껄렁하게 살고 싶다'와 그녀를 끝까지 챙긴 김민정시인의 시집 제목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은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암호일까 궁금하다.
2016.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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