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취몽인 2020. 6. 10. 11:17

술에 취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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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라는게 있다.
어쩌다보니 이틀 연속 제주도의 시를 담은 시집을 읽는다. 어제는 젊고 맑은 시인을, 오늘은 늙고 푸른 시인을.

이름 없는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 중에 유명한 시집을 꼽으라면 이 '... 성산포'도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벌써 30년 전에 나온 시집이고 시인도 구순을 넘었다.
살면서 몇 번인가 시집 속의 시 한 두 편을 만난 적은 있었지만 이미 읽은 것처럼 느껴지는 처음 읽는 시집이라니. ㅎㅎ

그것이 꼭 제주도여서는 아니라 생각한다. 바다는 어디에서든 그리운 곳일 테니까. 그저 오래 바라본 바다가 성산포였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 바다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고 속을 주고 받으며 시집 한 권이 꾸려졌을뿐. 시인이 구룡포에 있었음면 '그리운 구룡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긴 제주바다가 특별한건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싶다.

별다른 할 말이 있겠는가. 내 눈에도 선한 성산 바다.
그 짙푸르고 건강한 팔뚝이며 부숴져 튀어오르던 파도의 흰 눈썹들이며.. 시인이, 그 곳에서 詩를 쓰지 못하면 어찌 시인이겠는가. 표지도 파란, 시집 한 권을 읽고나니 손끝에 해삼 냄새, 소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궁금한 것 하나.
구순을 넘긴 노시인의 눈에 이제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할까? 바다도 늙었을까?
최근 詩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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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오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1980. 동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