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말할 수 없는 애인 / 김이듬

취몽인 2020. 6. 1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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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조언

나는 거지
아니다
교정을 배회하는 프티부르주아
아니다
나는 인간, 아니다
지금은 알고 싶지 않다

가방 하나 칼 한 자루
어제는 인문관 근처에서
오늘은 학군단 컨테이너 뒤에서 쑥을 캤다

때때로 버찌도 따고 모과나무 열매를 향해 돌을 던진다
그러다가 새들을 날려 보낸다

몇 해 전 글 잘 쓰던 소설가가 부임해왔지만 그는 곧
교수 자리에 안착해 소설 따윈 잊어버렸다
백내장으로 눈먼 언어학 교수는 식후에
여학생 둘의 팔짱을 끼고 매일 운동장을 세 바퀴 돈다

나는 내 시를 혐오하는 동료들과 장난을 치고
자기 시간을 빼앗았다고 내게 누명을 씌운 선배 강사와 농담을 한다

나는 일주일에 예닐곱 시간 단순노동을 하고
시간제로 임시직으로 조합도 정년도 없이 살게 될 것이다
제도에 반항하는 척
난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워 스스로를 위무한다

다단계냐 주유소 아르바이트냐 이게 문제예요
취직자리를 부탁하는 네 눈을 바라보며
나는 캘리포니인 건포도로 내 힘을 도왔고
네 슬픔의 자리를 경배했을 뿐
우리는 짧은 인사를 위해 느린 노래를 들었다
새들이 벌건 하늘을 저리 날아다니는 건 둥지가 어지러워 저러는 건 아닐 텐데

나는 프티부르주아 새끼들과 연합하여 문학
아니다
문학 비슷한 걸로 심포지움
아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릴 지껄였다
확실한 건 늙은 개털들에게 대가리를 주억거리는 개년이 되었다는 거다
그러니 내게 물어보지 마라
졸업해서 뭐합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꼭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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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등단하고 2011년에 펴낸 세 번째 시집.
시간은 십 년 단위로 흘렀군. 40대 초반에도 시인은 여전히 시니컬했군. 사는 일도 팍팍했고..
문학판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지난한 쪽팔림이 짙네.
詩들이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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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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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워'를 '사랑해'로 고쳐 말하라고 소리 질렀다
밥 먹다가 그는 떠났다
사랑스러운 거나 사랑하는 거나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나

죽은 친구를 묻기도 전에
민첩하게 그 슬픔과 분노를 시로 쓰던 친구의 친구를 본 적 있다
그 정신에 립스틱을 바르고
난 멍하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인은 시인다워야 하나

오늘 나는 문학적인 선언문을 고민한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이미 써서 카페에 올렸다
주저말고 서둘러야 한다
적이 문제다

'-적(的)'은 '-다운, -스러운'의 의미를 가진 접사인데
'문학적(文學的)'이라는 말
문학적 죽음, 문학적 행동, 문학적 선언, 시적 인식, 시적인 소설
나는 지금 시적으로 시를 쓸 수 없구나

문학적인 선언문을 쓰자는 말은
왕에게 속한 신성한 것을 그냥 불러서는 안 되는 폴리네시아 인처럼
은유로 도피하라거나
수사적 비유를 사용하라는 뜻은 아닐텐데
나는 한 줄 쓰는데 좌절하고 애통함에 무기력하다

그리하여 난 또다시 적(的)의 문제로 적(敵)을 만들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시적이지 않은 시를 쓰며
시인답지 못하게 살다
문학적이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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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호숫가 서점 꾸려가느라
괴롭고 즐거운 시인을 괴롭혔는가?
아, 그땐 책방 열기 전인가?

마지막 연의 몇 가지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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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본 거리


지나간다. 가장행렬이

두 눈과 입이 뚫린 가면을 쓰고
평생을 버티는 사람들의 연회장을 빠져나와
난 지금 옥상에 있다.
허드슨 강가 옛날 도축장이 있던 자리

난 물과 양분이 필요하고 가끔 사람의 열도 쐬어야 한다

상관없어
우리는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종족이 아니잖니

옥상 모퉁이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들은 비비대며 서로를 물어뜯다가
환풍기 옆 난간 쪽으로 다리를 옮기는 나를 보고도 흩어지지 않았다

저 아래 광장에는 비보이 날지 않는
기묘한 비둘기
거리의 바보, 화가, 연주자
거리의 여인
거리의 거지
저들이 찾는 것도 질 좋은 식료와 가죽일까

넌 이제 거리를 헤매지 않겠지 수많은 의상과 가면이 준비되었을 테지

누가 고함치고 누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또 누가 노래하나
포획과 은폐, 자유에 관하여
이 거대한 푸줏간을 어슬렁거리는 나는 게으른 종업원
나의 고깃덩어리를 관리한다

넌 이제 연회장에서 나와 꽃과 리본으로 장식한 차를 타는구나
잘 가
넌 이제 구속을 얻었구나
밤새 신부와 그 들러리들과 춤을 출테지
이 동네 최고의 미녀와 돈 많은 장인을 가졌다고
그것이 능력이라고 능력이 곧 자유라고 주례사가 한 말이 뻥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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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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