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지
친구 사무실에 얹혀 밥벌이 하던 시절 있었습니다
폭삭 늙은 옥상에서 자주 한숨 쉬곤 했었지요
구석구석 알뜰히 쇠락한 옥상 귀퉁이에 커다란 화분 하나 놓였었는데
빼곡하게 정구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변두리여도 서울인데 아파트 단지 한 귀퉁인데
어떻게 정구지가 싹을 틔었는지 궁금했지만 영문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뙤약볕에 옥상이 바싹 달아오르던 여름이 지나고
별빛 같은 꽃들이 피고 지더니 정구지 씨앗들이 촘촘히 맺혔습니다.
마침 더부살이도 더는 못할 형편이라 그 까만 씨앗들 한 줌 부벼 떠나는 짐꾸러미에 넣어 두었습니다
한참 지나 다른 곳에 짐 풀다 그 씨앗들 다시 만났습니다
집에 있는 빈 화분에 그냥 쏟고 흙으로 덮었습니다
버리는 게 미안해 물 한바가지 뿌려줬습니다
그 정구지
삼 년째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빽빽하게
한 해 피었다 저혼자 시들고 또 한 해 피었다 저물고 올해도 시퍼렇게 피었습니다
작은 화분에 얼마나 많은 씨앗을 쏟았는지
지들끼리 해걸이로 순서를 정해 피는 것 같습니다
꽂은 한 번도 피우지 못했습니다
반주 한 잔에 얼떨떨한 채 빈틈없이 피고 마르는 정구지 화분을 보다
울컥 미안했습니다
캄캄한 밤 10층 아파트 베란다에 목을 내밀고
정구지를 솎았습니다
손가락도 쉬 들어가지 않게 촘촘한 정구지 지옥
절반쯤 학살하니 세상이 조금 열린 것 같았습니다
마침 비가 내렸습니다
손을 씻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빡빡한 네 형편에 기대 버텼던 여름이 고마웠다 인사했습니다
정구지 보고 생각나 전화했다 했습니다
다음 주쯤 정구지찌짐에 막걸리 한 잔 하자 했습니다
창밖에 컴컴한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정구지들 한결 편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올해는 어쩌면 꽃이 필 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아직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씨앗이 많을 지도 모른다 싶어 또 미안했습니다
친구 사무실에 얹혀 밥벌이 하던 시절 있었습니다
폭삭 늙은 옥상에서 자주 한숨 쉬곤 했었지요
구석구석 알뜰히 쇠락한 옥상 귀퉁이에 커다란 화분 하나 놓였었는데
빼곡하게 정구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변두리여도 서울인데 아파트 단지 한 귀퉁인데
어떻게 정구지가 싹을 틔었는지 궁금했지만 영문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뙤약볕에 옥상이 바싹 달아오르던 여름이 지나고
별빛 같은 꽃들이 피고 지더니 정구지 씨앗들이 촘촘히 맺혔습니다.
마침 더부살이도 더는 못할 형편이라 그 까만 씨앗들 한 줌 부벼 떠나는 짐꾸러미에 넣어 두었습니다
한참 지나 다른 곳에 짐 풀다 그 씨앗들 다시 만났습니다
집에 있는 빈 화분에 그냥 쏟고 흙으로 덮었습니다
버리는 게 미안해 물 한바가지 뿌려줬습니다
그 정구지
삼 년째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빽빽하게
한 해 피었다 저혼자 시들고 또 한 해 피었다 저물고 올해도 시퍼렇게 피었습니다
작은 화분에 얼마나 많은 씨앗을 쏟았는지
지들끼리 해걸이로 순서를 정해 피는 것 같습니다
꽂은 한 번도 피우지 못했습니다
반주 한 잔에 얼떨떨한 채 빈틈없이 피고 마르는 정구지 화분을 보다
울컥 미안했습니다
캄캄한 밤 10층 아파트 베란다에 목을 내밀고
정구지를 솎았습니다
손가락도 쉬 들어가지 않게 촘촘한 정구지 지옥
절반쯤 학살하니 세상이 조금 열린 것 같았습니다
마침 비가 내렸습니다
손을 씻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빡빡한 네 형편에 기대 버텼던 여름이 고마웠다 인사했습니다
정구지 보고 생각나 전화했다 했습니다
다음 주쯤 정구지찌짐에 막걸리 한 잔 하자 했습니다
창밖에 컴컴한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정구지들 한결 편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올해는 어쩌면 꽃이 필 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아직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씨앗이 많을 지도 모른다 싶어 또 미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