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책과 문화 읽기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이성복

취몽인 2020. 6. 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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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시인의 시집을 읽고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대단하군! 하는 수 밖에.

오래된 시집을 읽으면 뜻밖의 행운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이 시집, 예전에 읽었음이 분명한데 해설을 황동규시인이 쓴 걸 이제 알았다. 환상적이지 않은가? 이성복의 시집을 황동규가 해설한다는 게.. 얼마전 읽은 시집의 해설자가 김현선생이었을 때보다 더 반가웠다.

황동규 시인이 여전히 그저 먹먹해 하는 내게 이성복 시의 길을 몇 개 가르쳐줬다. 의미 연결 방법으로서의 연상, 연상 전개의 속도감, 근원적 고통 같은 것들이 이 시인 시세계의 차별화 요소라고. 그런 것들이 단단하게 어울어져 흐르며 시적, 예술적 느낌을 만든다고..

그리고 시인 스스로 '무한화서' 같은 시론 강의에서 거듭 강조한 '언어에게 길을 맡기고 쭉 밀고 나가라'는 주문은 결국 황동규시인이 말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의 시라는 말과 서로 통하는 말로 이해된다.단 펼쳐지는 연상의 전개에 맡기되 기의건 기표건 고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시적 테크닉의 몫일 수도 있고 시인의 탁월한 재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한편 시에 일관되게 담긴 고통, 서러움, 아픔 등의 정서와 무채색의 톤 앤 무드 또한 이성복 스타일의 중요 기둥이라고 한다면 이 시인의 시적 자산은 얼마나 견고한 셈인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생각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일단 나섰으니 끝까지 가보고 다시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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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江

1

풀밭에서 잠들었어 내 몸이 물새알처럼 부서지고 날개 없는
꿈이 기어나왔어 아득히 흐린 하늘을 기어올라갔어 물새의
발자국을 남기며 풀밭에서 눈떴어 눈 없는 江이 흘러왔어
건너마을이 따라갔어 칭얼대며 피마자와 옥수수가 자라나고
플라스틱 칼이 내 몸에 박혔어 나를 버리고 물이 되었어
겨울을 생각하며 얼음이 되었어 그 다음엔 녹기만 하면 돼
깊이 가라앉아 몸 흔들면 돼, 순대처럼 토막토막 끊어져도
소리 안 지르는 快感, 기억 속에는 늙은 鍾지기만 남겨두는 일

2

江가에 누워 있었어 아낙네들 무밭을 매고 무우꽃은 하늘로
올라갔어 똑발로 누워 그림자를 감추었어 땀이 햇볕보다
먼저 흘러도 慾情은 끼룩끼룩 울며 다녔어 손 헹구고 마음
속에서 물새알을 꺼냈어 단단한 물새알 멀리 던져도 깨지지
않았어 떠도는 비누 거품 떠도는…… 벌겋게 녹슨 자갈 採取船으로
트럭이 다가왔어 엉겹결에 트럭은 떠났어 江가에 누워 있었어
미루나무 흔들릴 때마다 하늘은 뒤뚱거렸어(신기해, 신기해
저 江을 건너고도 죽음에 닿는 것은) 江가에 누워 있었어
목에 힘 빼고 물고기 化石이 되어갔어

3

그대 한없이 어두운 江가를 돌아왔어도 그대 病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네 그대 傷處 밑에는 한 점 불빛도 보이지 않고 죽은 물고기는
몸 속을 기웃거렸네 그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 사이로
시는 물거품처럼 번지고 苦痛은 길가에서 팔리고 있었지 내일은
主日이야 그대 아현동 正敎會의 희랍 사제를 기억하는지 내일은
主日이야 하품과 영광을 위해 돼지떼 속으로 다시 들어가진
않을는지 그대 툇마루는 아직 어지럽고 어머니는 老患을 사랑하고
있어 그대 飮料水를 마셔두게 별과 糞尿가 또 한 번 그대 彼岸으로
흐르게 하게

2008. 문학과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