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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뻘에 뿌리를 내린 삶이나 시간은 사람의 목구멍에 가락을 새기나보다. 그리고 그런 쌓임은 아무래도 나같이 퍽퍽한 경상도 사람들보다는 들도, 강도, 바다도 질펀한 남도 사람들에게 더하나보다.
사평역 톱밥 난로를 쬐던 서러움들은 먼 바다의 소금냄새가 비치는 남도 마을 육자배기 인생들에 슬어 시집 가득 가락으로 흐른다. 서럽지만, 서러워서 깊은, 제각기 염장된 사람들. 짠물 흐르는 마른 주름을 구기며 웃는 얼굴들. 그 곁의 탁주 냄새. 하늘 한 켠으로 저혼자 흐르는 만가. 그 사이로 질퍽한 논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헐렁한 그림자의 시인이 보이는 듯.
만가 - 금노에서
갈대꽃들이
진양조의 가락으로
산비탈을 오르고 있네
서러운 석삼십리
강물로 돌아가는 길
어허이야 한세상
뜬구름처럼 살았네
어허이야 한세상
범벅눈물로 지새웠네
검은 털 듬성 박힌 토종돼지 비계 한점
소줏잔에 적셔놓고
뒤돌아 바라보는 이승의 길들은
왜 이리 서럽고 찬란한지
여보시게,
선소리 메기는 저 상두꾼 아낙이여
극락이 어디냐고 누군가 묻거들랑
아랫목에 밥그릇 묻고
된장국 내음 갯바람에 날리던
한평생 뼛물 녹인
그리운 그 땅이라 일러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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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교 지나며 - 한 갈매기를 위하여
친구여
인천 만석동 개펄 어디에서
네가 처음 태어나던 날
나는 축전 하나 보내지 못했구나
세상일에 너무 쫓기고 허덕였으므로
밥벌이에 숨쉴 불똥 하나 찾지 못했으므로
갈매기 새끼 한 마리가 얼룩무늬 알을 깨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 살피지 못했구나
그래도 나는 안다 너를
시꺼먼 노을 내린 한강 인도교 강물 위에
한 점 라면봉지와 함께 떠서
네온사인 불빛도 콕콕 쪼아보고
불발인 채 떠밀려온 사과탄 한 알도 헤적여보고
열일곱에살을 판 방배동 순희
AIDS로 죽은 그애의 주검이 떠오른 난간 주위를
AIDS균처럼 서서히 헤엄쳐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숨이 차면
죽은 강물 한 모금도 으으윽 마셔보고
아아,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 너를
나는 안다 잿빛 날갯죽지에 까만 머리
물에 잠긴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여
오리처럼 뒤뚱뒤뚱 썩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너를.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창비.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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