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우리나라 풀 이름 외기 / 송수권

취몽인 2020. 8. 6. 14:15

.
.
詩를 끼고 산 지는 제법 오래 됐다. 하지만 제대로(?) 詩를 배운 적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선배들에게 몇 토막 배우고, 십 년 전쯤인가? 스무 시간 정도 한 김경주시인의 시창작교실에 다닌 게 누군가에게 詩를 배운 전부다. 그러니 새 詩라는 건 결국 혼자 끄적인 자폐의 흔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한 삼십 년 전쯤 됐으려나? 광화문 교보에서 송수권시인이 쓴 '송수권의 체험적 시론'이란 책을 샀었다. 詩와 관련해서 시집과 문예지 외에 처음 산 詩창작 가이드북이었다. 몇 년 동안 여러 번 읽었던 것 같다. 각 장이 끝나면 시인이 남겨준 숙제도 풀고 했었다. 내 블로그 어딘가에 그 숙제로 쓴 '나무'라는 詩가 남아 있는걸 얼마전 갈무리를 하며 발견하기도 했다. 어쨌던 그 책과 송수권시인은 내 詩 공부의 첫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그 책은 몇 년 전 어설픈 나를 시인이라 부르며 詩를 좀 더 알고싶다고 방법을 물어온 친구에게 줬다.

책장의 시집들을 정리하다 너덜해진 시인의 시집을 발견했다. 1987년, 내가 스물 여섯 나이로 장가 들 때 나온 시집이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없는데 2011년 혈압측정결과 쪽지가 책갈피 대신 꽂혀 있다. 아마 헌 책방에서 샀으리라. 건강한 혈압은 그때 모습이고..

읽던 책 덮어 놓고 다시 읽었다. 전남 고흥 출신의 시인. 서정주의 흙냄새 나는 상놈 목소리와 옆 동네 장흥 사는 이대흠시인 목소리의 중간쯤 같은 장단이 반갑다. 새삼 기억 나는 詩도 있다. 시집 제목은 또 어떤가? 요즘 내가 천착하는 '우리나라 풀 이름 외기'이니 한 번 선생은 영원한 선생이란 말이 틀리지 않다.

시인은 수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가 사랑하던 흙 속으로 가셨을 것이다. 근본 없는 저 혼자 제자는 이제 조금 詩가 뭔지 알아가는 중이다. 선생의 덕이 크다 생각한다. 숙제로 내 준 '나무'는 아직도 하고 있는 중이다. 오래 생각한 해답이 있었는데 오늘 시집을 읽다보니 선생이 먼저 써버리셨다. 난감한 일이다. 방향을 틀어 써야할 지 다른 길을 찾아야할 지 잘 모르겠다. 살아계셨으면 물어 볼 수도 있었을텐데..

여러모로 그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날이다.

-------------------------------------------------



언제나 내 꿈꾸는 봄은
서문리 네거리
그 비각거리 한 귀퉁이에서 철판을 두들기는
대장간의 즐거운 망치 소리 속에
숨어 있다

무싯날에도 마부들이 줄을 이었다
말은 길마 벗고 마부는 굽을 쳐들고
대장간 영감은 말발굽에 편자를 붙여 가며
못을 쳐댔다

말은 네 굽 땅에 박고
하늘 높이 갈기를 흔들며 울었다
그 화덕에서 어두운 하늘에 퍼붓던 불꽃
그 시절 빛났던 우리들의 연애와 추수와 노동

지금도 그 골짜기의 깊은 숲
깜깜한 못물 속을 들여다보면
처릉처릉 울릴 듯한
겨울 산 뻐꾸기 소리.....
집집마다 고드름 발은 풀어지고
새로짓는 낙숫물 소리
산들은 느리게 트림을 하며 깨어나서
봉황신 기슭에 먼저 봄이 왔다


1987. 문학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