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그 모든 가장자리 / 백무산

취몽인 2020. 8. 19. 13:50

허수아비

 

 

주정뱅이 노인이 죽자

마을에는 귀신이 자주 출몰했다

노인이 사라지자 마을 공기가 가라앉고

사람들 눈길이 닿지 않는 구석이 부쩍 늘었다

 

노인이 떠나자 집들의 담장 높이는 하뼘이나 자라났고

큰 소리로 떠들기보다 귓속말이 많아지고 

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살림의 해진 밑바다게 시커먼

헌데가 자꾸 드러나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였다

 

마을의 소음을 도맡아 일으키는 골치거리였으나

노인의 이상한 혼자말이 폐가를 돌아다니고 죽은 짐승들을 파묻은

썩은 구덩이를 들추고 음산한 다리 밑을 헤집고 다녔었다

 

가뜩이나 아이들 소리도 떠나고 없고

밤마실 끌고 다니던 이야기꾼 할머니도 작년에 떠나고

동네 궂은 욕을 도맡던 반벙어리 늙은이도 떠난 뒤에는

어두운 헛간이나 골목에서 귀신들이 사람들을 자주 놀래키었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마당 불을 일찍 끄고 티브이를 보거나

비슷한 처지끼리만 어울려 속을 감추고 쑤군거렸다

귀신들 장난 때문에 가슴에 도사렸던 상처들이 불현듯 되살아나고

마음의 그늘이 잘 비워지지 않아 닦아도 닦아도 눅눅한 곰팡내가 났다

 

주정뱅이가 일으켰던 분란과 대책 없이 낯선 말들이

마을의 퀴퀴한 그늘과 삶의 허방 구덩이를

파고드는 귀신을 쫒는 허수아비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이 생긴 이후 한번도 대가 끊긴 적이 없는

주정뱅이의 후계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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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시집을 또 샀다.
그 전에는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다.
이 시인이 집요하게 나를 찾는 이유는 뮌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가?


백무산<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