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태아의 잠 / 김기택

취몽인 2020. 9. 1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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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도축장에서

아무도 생명과 음식을 구별하지 않는다네
뒤뚱뒤뚱거리던 걸음과 순한 표정들은
게걸스럽던 식욕과 평화스럽던 되새김들은
순서 없이 통과 리어카에 포개져 있네
쓰레기처럼 길가에 엎질러져 쌓여 있네
비명과 발버둥만 제거하면 아무리 큰 힘도
여기서는 바로 음식이 된다네
하루 세 번 양치질하는 이빨들이 씹을 음식이 된다네
해골이 되려고 순대와 족발이 되려고
저것들은 당당하게 자궁을 열고 나왔다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와 생명이 되려고
통닭들은 노른자를 빨아들이며 커간다네
똥오줌 위에 흘린 정액을 밟고 들어가면
슬픈 눈동자들은 곧 음식이 되어 나온다네

- 1991. 문학과 지성.

시인의 최근 시집을 몇 권 읽고 30년전 첫 시집을 찾아 읽었다. 묘사는 현재 시인의 작품들 보다 더 치열하다. 다소 거칠지만. 생명, 동물성 속에 비치는 인간의 원초적 본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 시인의 개성을 이룬다. 개성은 세월과 함께 모서리가 닳지만 함의는 더욱 깊어지는 법.
아직 자갈밭을 뒹구는 내 모습에도 희망을 느낀다.

202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