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내 무덤, 푸르고 / 최승자

취몽인 2020. 9. 29. 15:16

.
근황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

무거운 죽음 하나를 떠나보내고 읽는 최승자는 유난히 가깝게 느껴진다. 늘 삶 너머의 죽음 속을 헤매고 다니는 시인. 삶이 죽음에 덮여있다 생각할 때 주변에 닥치는 죽음은 오히려 가벼울 것이다.

아직 책을 읽을 수 없다. 쉽게 헤어지리라 여겼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평생은 단 며칠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한참 걸릴 것 같다. 그게 마땅하기도 하다.

---------------------------------

下岸發 1


詩로써 깃발을 올릴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내가 詩로써
무슨 깃발을 올릴 수 있으랴.
나의 삶 자체가
시종 펄럭거리는
찢어진 깃발인 것을.

-- 오, 바람에 끊임없이
창문들이 휘날리는군.
네 머리를 잘 걸어둬.
날아갈라. 날아가, 그나마
하수구에 처박힐라.

- 최승자.<내무덤, 푸르고> 1993.문지


- 1993. 문학과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