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 이문재

취몽인 2020. 10. 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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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구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는데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 이문재.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문학동네. 2001.

이문재시인의 초기 詩들이 담긴 시집이다. 고향마을과 그 변두리를 떠도는 서러움들이 많다. 긴 호흡의 詩들.. 이제는 늙었으되 서러운 젊은 날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 그 파편들이 젊은 시인의 고통 속에서 베어나온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 고통을 둥글게 만들기도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