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에세이

여덟시에 떠나는 두 편의 기차

취몽인 2020. 11. 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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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시에 떠나는 두 편의 기차


  몇 년 전 택시운전을 할 때의 일이다. 한 주간씩 번갈아 주간근무와 야간근무를 교차해야 했다. 일주일 단위로 밤낮이 바뀌는 생활은 하루 열시간 이상 운전을 해야하는 고됨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특히 야간근무의 경우 오후 다섯 시에 집을 나서 꼬박 밤을 새워 운전을 하고 다음날 새벽 여섯시쯤에 집으로 돌아오면 온몸은 녹초가 됐었다. 바로 잠을 자야 오후에 다시 일을 나갈 수 있지만 피로와 각성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아침에 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간단한 조반에 소주를 몇 잔 곁들여 각성을 무디게 만들어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이런 저런 힘듬 덕분에 일년반 정도의 택시 운전수 노릇은 몸무게의 10% 정도를 덜어낼 정도로 만만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혹독한 밥벌이의 시간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있었다. 우선,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운전 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이상 언제든지 노후를 보낼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했다. 비교적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내가 힘들게 일한만큼 수입을 보장 받을 수 있는게 택시운전의 장점이다. 그리고 나이가 더 들수록 생활비는 줄어드는만큼 그리 고되고 혹독하게 일하지 않아도 내게 필요한 적당한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융통성 또는 유연성으로 인해 심리적 안정감까지 가질 수 있다.

  앞서 말한 유익이 다분히 경제적인 관점의 유익이라면 다른 하나의 유익은 근 육십년을 살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내 속의 새로운 정서를 발견한 것이다. 택시운전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일까? 자동차? 동료? 손님? 내겐 라디오였다.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손님을 찾기위해 차고지를 나설 때 먼저 라디오를 켠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남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소리를 싫어해서 주로 음악방송을 들었다. 기본적으로 클래식 FM을 가장 많이 듣고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디제이의 말수가 적고 올드팝이나 포크 발라드를 주로 들려주는 다른 채널을 선택했다. 가끔 손님이 시끄럽다고 꺼달라는 경우 외에는 주간근무건 야간근무건 일하는 내내 라디오에 귀를 맡겼다.

  사실 나는 그간 음악과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목소리는 좋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지만 교회 성가대를 제법 오래 했음에도 타고난 박치라 노래를 맛깔나게 부르지 못한다. 거기다 최신 가요 같은 걸 듣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아 아는 노래도 별로 없는 형편이다.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고 이래저래 음악적 소양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다만 예술에 대한 쓸데없는 목마름이 있다보니 숙제처럼 클래식을 오래 들었고 이제는 교향곡 2악장의 부드러운 멜로디 정도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귀를 얻기는 했다. 하지만 택시 운전을 하면서, 긴 시간을 라디오로 이런저런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의 가치와 편익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것외에는 아무 목적도 생각도 없는 속도의 시간을 달리며 침묵 속에서 듣는 음악들은 어느 때보다 가슴 깊이 다가왔다. 브라질의 가수 솔레다드 브라보의 가슴을 후벼 파는 목소리나 짐리브스의 부드러운 노래, 브람스나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것들이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더한 슬픔으로 다가왔었다. 그간 가소롭게만 생각했었던 대중가요의 가사들에 담긴 사랑의 의미가 그렇게 깊은 것인지를 처음으로 느끼기도 했었다. 그 노래들은 잊고 살았던 지난 시절 내 사랑의 시간들 속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고 그때 그녀의 생각을 새삼 들여다보게 해주기도 했었다.

특히 자정을 넘어 취객들을 실어나르는 시간마저 끝난 심야 시간에 듣는 음악은 더욱 내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사위는 온통 캄캄하고 거리에는 빈 가로등 불빛과 빈 택시들만이 다니는 시간에 듣는 어떤 음악들은 자극이 더 강력하기 일쑤여서 눈물이 날 정도의 감동을 주기도 했었다.    

 

 그날도 새벽 두 시경 빈차로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심야 재방송 프로에서 가슴을 후벼 파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조수미의 맑고 높은 목소리였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였다.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1960년 무렵에 작곡한 노래로 역시 그리스의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발차가 불러 익히 알고 있던 곡이었다. 평소에도 좋아하는 음악이었기에 자주 들었지만 그 새벽 투명한 얼음 같은 조수미의 목소리는 가슴을 그리고 머리를 깊게 찔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음악은 이런 것이구나.

 그날 밤의 감동은 제법 오래 갔다. 유투브를 통해 여러번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 새벽, 이번에는 아그네스발차의 오리지널을 들었다. 같은 노래인데 이번에는 몹시 슬펐다. 똑같이 눈물이 날뻔 했지만 이전 조수미의 목소리를 들을 때와는 다른 눈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참 슬프다. 조수미는 아름다워 눈물이 날뻔 했는데 아그네스발차는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는 차이. 음악은 그런 것이었다. 같은 노래라도 표현이 다르면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그래서 같은 명곡이라도 연주자나 지휘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의 음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새삼 공감할 수 있었다. 음악은 그런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는 처음의 그 강력한 감동을 주었던 조수미보다 잔잔하게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아그네스발차의 목소리가 더 오래 남았다. 이유는 뭐랄까? 내 감성에 더 조응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 오리지널은 아그네스발차이지만 예술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조수미가 오리지널처럼 느껴지고 아그네스발차가 개성적이라고 생각된다는 것? 그런 생각들을 해봤지만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다. 그냥 더 좋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어디 음악만 그렇겠는가. 詩도 그렇지 않겠는가 똑같은 사물이나 정황을 노래해도 그 목소리는 시인마다 다르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해석도 있고, 주변을 울리는 묘사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낫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의 취향도 있고 독자의 취향도 있다. 단지 생각할 것은 시인만의 느낌이나 정조가 담겨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담았다면 시인은 제 할 일을 어느 정도 한 것이고, 그 담아놓은 가치를 온전히 느끼고 못느끼고는 독자의 몫일뿐이다. 느낌은 변할 수 있다. 내가 조수미에 빠졌다가 아그네스발차로 돌아간 것처럼.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는 멜로디로 존재하고 떠나는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가수의 몫이다. 그리고 듣는 이는 또한 스스로만의 가슴에 더 깊이 와닿는 목소리를 거듭 들을 뿐이다.

 

 어떻게 노래를 부를까?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는데. 이쪽으로 한 대, 저쪽으로 한 대, 나누어 떠나는데 나는 어느 기차를 탈 것인가? 내목소리는 누구를 붙들어야 하는가? 무엇으로 붙들어야 하는가? 캄캄한 새벽에 운전석에 푹 주저 앉아 침묵속을 달리던 그날, 내게 다가왔던 음악은 이제는 두고두고 내 시를 향한 물음으로 남았다. 

 

 몇 달 뒤면 다시 택시운전을 하게 될 것 같다. 나쁘지 않다. 택시는 내게 고단하지만 깊은 심연을 주었다. 나는 기꺼이 그 속으로 들어가 또 다른 세계를 만날 것이다. 내 시도 그 곳에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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