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語
아침에 페북을 보다 페친인 신휘시인이 쓴 글 중에서 "고기도 항거씩 사놓고"라는 문장을 봤다.
"항거씩",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표준말로 말하자면 "가득", "충분히" 정도의 의미인 "항거씩".
내 입으로 이말을 뱉어본 적이 언제인가? 대구를 떠나와 서울에 주저 앉은 지 올해로 37년째. 어설픈 기억으로 서울 와서는 한 번도 입에 담아보지 못한 말이다. 어릴 적 소쿠리에 고구마 항거씩 담아 온 식구가 종일 먹던 일이나 명절전 날 튀밥 항거씩 튀겨 들고 오던 일처럼 항거씩은 이제 내겐 점점 멀어지는 고향의 냄새와 더불어 화석이 되고 있는 말이다.
막 서울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1985년, 매 주마다 대구로 내려갔었다. 맨질맨질한 서울말 속에서 모서리를 깎아가며 말을 하다 서대구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내려 택시를 타고 "반고개 가입시더" 라고 우리 동네 말을 크게 밷었을 때의 시원함도 오래전 기억으로 남았다.
아내도 대구 사람이고 어머니, 동생이 있어 집안에서는 고향말을 썼지만 그것도 세월 앞에선 금세 삭아버렸다. 아이들이 태어나고는 그 속도가 더 빨라졌고. 서울말도, 대구말도 아닌 두루뭉실한 말투로 바뀐 건 환경과 세월 탓이라 하지만 그 시절 그곳의 말들을 잃어버린건 더 안타깝다. 박목월의 시 '뭐라카노'를 읽으며 두류산과 이구못을 쏘다니며 친구들과 쏟았던 고향의 수다를 생각하기도 하고 유난히 구수한 남도 시인들의 말투를 부러워하며 내게서 지워져 버린 말들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경상도 말은 좀 거칠고 투박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타지에서 오래 살면 그 거친 모서리들이 닳아버리기 쉽다. 지역감정이 험했던 시절 전라도 사람들이 그들의 말투를 숨기고 재빨리 서울 말로 갈아타야 삶이 유리했던 때에도 비교적 당당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권위(?)의 말뽄새였지만 지금은 다 마찬가지다. 그저 촌놈 말씨인 것은 한 가지. 대부분 주류 말투에 투항하고 고집 세거나 어쩔 수 없는 사람들만 고맙게 지키고 있는 그 말투들. 역에서나, 전화 통화 목소리로만 어쩌다 시원하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서울에 와서 서울 친구들에게 장난 삼아 "수채 구디 파구로 정지 뒤에 가서 수굼퍼 좀 가꼬 온나" 라 말하고 뭔 뜻인지 아느냐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외계어였다. 하지만 지금 '수채' 나 '정지'나 '구디' 나 '수굼퍼'는 내게도 외계어이다. 다 잃어버린 말들이다. 잃어버린 내고향 말이 그야말로 '항거씩'인 것이다.
그렇게 내 은유의 근본은 말라가고 고향은 지워지고 있으니..
다 까묵기 전에 쪼매씩이라도 어따 적어놓기라도 해야할라나..
2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