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오늘 하루만이라도 / 황동규

취몽인 2021. 3. 1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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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한 점

한창때 그대의 시는
그대의 앞길 밝혀주던 횃불이었어.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없던 길 내고
그대를 가게 했지. 그대가 길이었어.

60년이 바람처럼 오고 갔다.
이제 그대의 눈 어둑어둑,
도로 표지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표지판들이
일 없인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게끔 되었어.

이제 그대의 시는 안개에 갇혀 출항 못 하는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
그래도 어둠보단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
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어느 배에선가 나도! 하고 불이 하나 켜진다. 반갑다.
끄지 마시라.


- 황동규 문학과 지성.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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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시집이라 쓰려다 만다.
앞으로도 시를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집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없듯이
내 시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자.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

詩 한 편이 아니라 시집 한 권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경우를 만났다. 여든 넷, 눈 내리는 포구나 첩첩 강원도를 걸어서, 프레스토를 타고 휘날렸던 시인은 이제 집 뒤 서달산 산책도 아껴 다녀야 한다고 말한다. 눈도 잘 안보이고 자꾸 넘어지신단다. 그런 이야기를 시집에 담았다. 물론 그 너머 이야기를 위해서. 그런데 그 너머보다 쇠약한 몸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정신이 자꾸 눈을 막아 슬펐다.
살면서 적지 않은 시집을 읽었다. 그중에 거듭 가장 많이 읽은 시인은 황동규다. 요즘 더 마음이 가는 시인도 있지만 쉰 고개 넘으며 한 오 년은 끼고 살았다. 오롯히 혼자인 화장실에 두고 표지가 문드러지도록 읽은 시집도 황동규다. 그런 시인이 스러지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담은 시집을 읽는 일이 슬프다.
그래도 읽는다. 가는 눈 내리는 작은 포구에서 소주 한 잔하는 영원의 노스텔지어를 내게 새겨준 시인. 언제까지나 길 사라지는 바닷가에 내리는 눈을 그리워하게 만든 시인. 그 천천히 녹아 사라지는 풍경 같은 시인을 가슴에 남겨야 할 때인 듯해서.
다음 주엔 시인을 대신해서, 아니 시인을 마음에 품고 작은 바닷가에라도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