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취몽인 2021. 3. 2.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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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窓)

어느 날 아침
이층으로 올라가 열린 창가에 서서
면도를 하였다.
면도기에 스위치를 넣었다.
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가르릉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포효소리가 되었다.
헬리콥터 소리가 되었다.
한 목소리가, 조종사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소리쳤다.
'눈감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보시는 겁니다.'
일어났다.
여름 위로 낮게 비행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조그마한 것들, 그들은 무게가 있을까?
수도 없는 초록의 방언들.
특히나 목재 가옥의 붉은 벽들.
풍뎅이들이 햇빛 속, 거름 속을 번쩍이고 있었다.
뿌리째 뽑힌 지하실들이
공중을 항해하였다.
움직이는 공장들.
인쇄소가 기어왔다.
그 순간 사람들만이
동작 없는 유일한 물체였다.
사람들은 침묵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묘지에 잠든 자들이
카메라의 유년시절에 쵤영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공비행!
나는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馬)의 시야처럼
시야가 갈라졌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들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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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스웨덴 생. 2011 노벨문학상.
스웨덴 사람들이 '말똥가리 시인'이라 부른다는 스웨덴 자연시를 대표하는 시인.
세상을, 주변을 바라보는 자연의 눈을 가진 시인.
네번째 다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