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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차적
평생 사내 등짝 하나 뒤집지 못한 여자가 마당 돌덩이화덕에 솥뚜껑을 뒤집어놓는 날, 잔칫날이었지 불을 지피면 바삭바삭 엎드려 울던 잘 마른 꽁깍지
속구배이 어구신 배추는 칼등으로 툭툭 쳐 숨을 죽여야 된다 호통치는 소리, 배차적을 부쳤지 가련한 속을 모르는 참 가련한 생을 가지런하게 뒤집었지 돼지기름 끓는 솥뚜껑 위에
배추전이 아니라 배차적,
달사무리하고 얄시리한 슬픔 같은 거
산등성이로 전쟁이 지나가는 동안 아랫도리 화끈거리던 밤은 돌아오지 않았고
멀건 밀가루 반죽이 많이 들어가면 성화를 내던 들판들, 무른 길들을 죽죽 찢어 먹던 산맥들, 고욤나무 곁가지 같던 손가락들
이마의 땀방울을 받아먹던 사그라지는 검불의 눈이 그래도 곱던 시절이 있었니더 아지매는 아니껴?
제삿날에는 퉁퉁 부은 눈덩이로 썰어 먹던 배차적, 여자는 무꾸국처럼 하얘졌지
울진 영덕 봉화 영양 청송 영주 안동 예천 의성 문경 상주 가가호호 배차적 냄새가 송충이처럼 스멀스멀 콧등을 기어갔지
-안도현. 창비시선 44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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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예천 들어가 집 짓고 마당 꾸미느라 바쁘다는 시인이 팔년만에 낸 시집 마지막 년에서 지청구를 던진다.
꽃 이름 좀 외겠노라 한 일년 열심히 퍼나르다 밑천 떨어져 그만둔 지 사흘 된 건 어찌 알았누. 그래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어찌 그게 꽃 이름만이랴. 詩살림도 별 수 없이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면 되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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