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물 건너는 사람 / 김명인

취몽인 2021. 3. 2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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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에 오르다

쥐불에 그을린 들판은 거뭇거뭇하다. 마음의 흉터처럼
타버린 것들이 온통 유적이 되는 산간 분지
메마른 땅이 거름을 얻으려고, 병든 몸이 병을 고치려고
경원가도, 봄이 온다고
제가끔 사려잡은 나무들이 막 피어오르는 물빛에 젖고 있다
덕진은 어디쯤일까, 이 길 끝에 있다는 추가령계곡
찢긴 계곡은 쓸쓸히 물놀이져 입 안에서
맴돌아도 휴전선 이북이고
나는, 삼팔선을 넘으려니
그 경계에 드는 차를 검문소가 가로막는다, 차장 밖으로
봄풀인 듯 파릇파릇 한 아이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들길을 걸어간다, 그 뒤를
물색 없는 후생으로 따르는 저 만취한 아지랑이
눈 시린 세월을 흔들어 갈 길을 지우는 것은
그것조차 건너가는 것이기 때문,
눅눅히 젖어 흐르는 강물도 거기서 빛깔을 얻었으리라
하나, 오늘 눈앞의 산맥을 보면
한 짐 서책을 짊어지고 산 속에 들었다가 영영
되돌아 나오지 못한 옛 친구
薺月이 생각난다, 그가 읽으려 했던 책 속의 길이
어떤 깨우침으로도, 단 한 줄 글로도 세상 이정 위에 겹쳐진 적은 없으나
나는 그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스스로의 계곡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뒤에는
초입에 놓인 유적마저 제 그늘로 덮어버리고
웅숭그려 엎드리는 산세인 것을
헛된 욕망의 주석으로 나도 내 글이
덕지덕지 얼룩이 되어 한 길을 난마로 헝클어놓을까 두려웠다
꿈이 흔적을 남기겠느냐, 헤매고 다니던
자취가 자국으로 남겠느냐
병이 깊어지고, 약이 몸을 다스리지 못해 풍경을
허전한 책장처럼 넘겨다보는 지금
신열에 들뜬 세월을 끌고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은
이 길 어딘가에 있다는 단식원을 찾아서가 아니라
어느 퀭한 생애 속
저렇게 펑 뚫린 유적에 올라
캄캄한 미로를 더듬어 나아가다 나도 어디쯤에서
돌아 나갈 입구를 지워버린 채
목 놓고 싶은 마음, 이렇게 온몸으로 아파오는 탓일까

-김명인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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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좋아하는 詩 '너와집 한 채'가 실린 시집. 그 詩를 굳이 시집 속에서 읽고 싶었다. 쓸데 없는 취향이지만 그러고 싶을 땐 그러고 사는 게 좋다.
시집 속, 또 한 편의 좋아하는 詩를 옮겨본다.
유적, 살아온 날이 모두 유적 아닌가. 내 뒤돌아보면 온 길이 작은 흉터로 촘촘한 유적인 것을. 한 걸음도 뒤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완고한 시간이 모두 유적이라면 또 한 걸음 앞으로 딛어 뒤를 쌓는 일 말고 무엇을 하겠는가. 지울 것도 없는, 돌아 나갈 수 없는 입구는 그저 내 뒤에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