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적에 오르다
쥐불에 그을린 들판은 거뭇거뭇하다. 마음의 흉터처럼
타버린 것들이 온통 유적이 되는 산간 분지
메마른 땅이 거름을 얻으려고, 병든 몸이 병을 고치려고
경원가도, 봄이 온다고
제가끔 사려잡은 나무들이 막 피어오르는 물빛에 젖고 있다
덕진은 어디쯤일까, 이 길 끝에 있다는 추가령계곡
찢긴 계곡은 쓸쓸히 물놀이져 입 안에서
맴돌아도 휴전선 이북이고
나는, 삼팔선을 넘으려니
그 경계에 드는 차를 검문소가 가로막는다, 차장 밖으로
봄풀인 듯 파릇파릇 한 아이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들길을 걸어간다, 그 뒤를
물색 없는 후생으로 따르는 저 만취한 아지랑이
눈 시린 세월을 흔들어 갈 길을 지우는 것은
그것조차 건너가는 것이기 때문,
눅눅히 젖어 흐르는 강물도 거기서 빛깔을 얻었으리라
하나, 오늘 눈앞의 산맥을 보면
한 짐 서책을 짊어지고 산 속에 들었다가 영영
되돌아 나오지 못한 옛 친구
薺月이 생각난다, 그가 읽으려 했던 책 속의 길이
어떤 깨우침으로도, 단 한 줄 글로도 세상 이정 위에 겹쳐진 적은 없으나
나는 그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스스로의 계곡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뒤에는
초입에 놓인 유적마저 제 그늘로 덮어버리고
웅숭그려 엎드리는 산세인 것을
헛된 욕망의 주석으로 나도 내 글이
덕지덕지 얼룩이 되어 한 길을 난마로 헝클어놓을까 두려웠다
꿈이 흔적을 남기겠느냐, 헤매고 다니던
자취가 자국으로 남겠느냐
병이 깊어지고, 약이 몸을 다스리지 못해 풍경을
허전한 책장처럼 넘겨다보는 지금
신열에 들뜬 세월을 끌고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은
이 길 어딘가에 있다는 단식원을 찾아서가 아니라
어느 퀭한 생애 속
저렇게 펑 뚫린 유적에 올라
캄캄한 미로를 더듬어 나아가다 나도 어디쯤에서
돌아 나갈 입구를 지워버린 채
목 놓고 싶은 마음, 이렇게 온몸으로 아파오는 탓일까
-김명인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
내 좋아하는 詩 '너와집 한 채'가 실린 시집. 그 詩를 굳이 시집 속에서 읽고 싶었다. 쓸데 없는 취향이지만 그러고 싶을 땐 그러고 사는 게 좋다.
시집 속, 또 한 편의 좋아하는 詩를 옮겨본다.
유적, 살아온 날이 모두 유적 아닌가. 내 뒤돌아보면 온 길이 작은 흉터로 촘촘한 유적인 것을. 한 걸음도 뒤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완고한 시간이 모두 유적이라면 또 한 걸음 앞으로 딛어 뒤를 쌓는 일 말고 무엇을 하겠는가. 지울 것도 없는, 돌아 나갈 수 없는 입구는 그저 내 뒤에 있을 뿐.
'이야기舍廊 > 詩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 장석남 (0) | 2021.03.25 |
---|---|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 김기택 (0) | 2021.03.24 |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 안도현 엮음 (0) | 2021.03.20 |
오늘 하루만이라도 / 황동규 (0) | 2021.03.10 |
능소화가 피면서 창가에 악기를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안도현 (0) | 2021.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