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반고개 추억

71년, 삼거리 풍경

취몽인 2021. 3. 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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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삼거리 풍경


아버지 철공소가 있던 삼거리
새길시장 가는 왼쪽 길에는 정미소가 있었고
건너편 성수네 가게 앞에는
조랑말이 끄는 구루마 서넛 늘 서있었다
말똥을 주먹처럼 쏟던 말들은
차례가 되면 쌀가마니를 억수로 싣고
비틀비틀 어디론가 떠났다
오른쪽 길을 쭉 가면 사보이극장 지나 서문시장
버스는 다니지 않아 걸어서 외가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면소재지 같았던 직할시의 변두리
아버지는 매일 쇠를 깎고
좀 더 어린 시절 나는 그 곳을 헛도는 기계에
왼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손에 피가 철철 흐르는 나를 안고
세신의원으로 달리던 어머니
화들짝 놀라 뛰쳐오르던 점박이 조랑말
대부분 나른한 습자지 같은 삼거리의 기억은
딱 그 한 장면만 펄떡이는데
이학년때 한반이었던 도장포집 아들 성수는
그나마도 아무 기억이 없다 하고
피대소리 요란하던 정미소도
불꽃 튀던 철공소도
의뭉스럽던 말들이나 그 뒤에 매달렸던 조각배 같던 구루마도 이젠 가물가물
삼거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길을 찢고 있을텐데
아버지 어머니 다 떠난 이 즈음에
그 사라진 것들의 행방이 자꾸 궁금해지는 건
덩달아 지워지는 내 걸음 때문인가
내일 모레 아버지 만나러 가는 두려움 때문인가


2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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