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악의 평범성 / 이산하

취몽인 2021. 4. 5.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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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갇혀 있다

아날로그 양초촛불이 디지털 LED촛불로 바뀌었다.
아날로그 촛불은 자기 온몸을 다 태우고 녹지만
디지털 촛불은 장렬하게 전사할 심지와 근육이 없다.
노동자에서 소시민적 인텔리로 동력이 바뀐 신호였다
땅을 갈아엎어 토양을 바꾸지는 못하고
기껏 나무를 골라 옮겨 심을 뿐인데도 연일 축제이다.
그래서 촛불도 계속 광화문 광장에 갇혀 있었고
세월호의 노란 리본도 광화문 광장에 갇혀 있었다.

촛불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했다.
30년 전 박종철, 이한열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꽃은 피자마자 졌다.
30년 후 세월호 아이들과 백남기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불꽃도 피자마자 졌다.
6월항쟁에 벽돌 한 장씩을 얹었던 청춘들은
노동없는 디지털 촛불에 눈이 멀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제 광화문광장은 텅 비었다.
독재의 무기는 칼이고 자본의 무기는 돈이다.
칼은 몸을 베고 돈은 정신을 벤다.
우리는 몸도 베였고 정신도 베였다.
우리는 아직 이것밖에 안 된다.

앞으로도 우리의 입은 여전히 진보를 외칠 것이고
발은 지폐가 깔린 안전한 길을 골라 걸을 것이다.
촛불의 열매를 챙긴 소수 민주주의적 엘리트들 역시
노동대중을 벌레처럼 털어내며 더욱 창대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의회공화국이며
모든 권력도 국민이 아니라 자본과
소수 좌우 엘리트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심지 없는 촛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기득권자들을 위해 적당하게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난 촛불이 타오를수록 더욱 슬프다.

-이산하 .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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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책방에 들렀다. 그곳에 가면 사려고 미뤄뒀던 이산하시인의 시집을 어렵게 샀다. 다 팔리고 예약한 손님이 찾아가지 않은 저자 사인본 시집을 빼앗듯 사서 왔다. 이산하시인은 이 시집을 우**님에게 드린다고 사인을 해놨는데 주인은 내가 됐다.

시집 앞부분의 시들을 읽다 소름이 돋았다. 뼛속 깊이 박힌 녹슨 못을 천천히 뽑는 시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아프다' 소리 한 마디 없이 저리 침착하게 고통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곁에 누군가를 앉혀놓고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주듯 시인은 노래한다. 아니 침묵의 비명을 낮게 들려준다. 섬뜩하다. 가슴 한 켠이 자꾸 베인다.

며칠 전 손보기를 그만 둔 원고 생각이 난다. 그것들을 시라 이름하기가 몹시 부끄럽다. 정말 시를 본 탓일까?

갈피를 접어 둔 몇 편 시 중에서 한 편을 골라 옮긴다. 더 좋은 시가 많다. 하지만 가슴을 찌르는 목소리가 자꾸 덜미를 잡아 손으로 다시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