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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빰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다산책방.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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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시인이 고른 51편의 시와 그의 생각들.
오늘 오전은 모처럼 쉬는 시간.
#김기택시인이 엮은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를 마저 읽는다.
사물의 내면에 대한 집요한 묘사에 탁월한 시인이 고른 51편의 詩와 그 詩들에 붙인 시인의 산문으로 이루어졌다.
여러가지 일로 분주한 요즘,
이 책의 제목이 새삼스럽다.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라..
쓰기는 고사하고 읽기도 멈춘 나를 부르는 소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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