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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국수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르륵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항셔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강산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고영민 . 창비시선.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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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일, 그 시간과 입맛 속에도 한 역사 분량의 마음이 있다. 인생은 목구멍을 후르륵 넘어가는 국수가닥 같은 것. 그렇게 매끄럽게 입맛을 다시는 삶이라면 참 좋겠다. 쉬 배가 꺼질지라도 한 그릇을 온전히 다 들이킬 수 있는 국물처럼 그렇게 시원했으면..
시집을 사서 나오는데 김이듬시인이 내가 고영민시인을 닮았다고 했다. 얼굴은 모르겠고 감칠맛 나는 시인의 마음을 눈곱만큼이라도 닮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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