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취몽인 2021. 6. 13. 07:42

.
水墨 정원 9
-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01.

-------------------------------------
장석남 다시 읽기 세번째.

바야흐르 시인은 이제 고이는 못물이 되고 번지는 수묵의 경계가 되고 조금씩 사라져 간다. 이십년 전부터 시작된 소멸의 조짐은 최근에는 죽음 저편에서 詩를 쓰기도 하니 오래 지워지고 있는 셈이다.

단어 하나에 온 세상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곁, 결, 사이, 어둠, 그림자, 냄새. 같은 단어들. 가만히 그것들을 입안에서 굴려보면 내 안의 오만 생각이 이는 걸 느낄 수 있다. 스쳐 지나간 어떤 사람이나 어느 순간의 설움 같은 것들을 단어들은 돌멩이 속처럼 단단히 품고 있다.

위 詩의 번짐을 생각해보라. 너는 지금 어디로 번지고 있으며 너를 물들이는 번짐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번져서 너는 무엇이 되며 번짐의 끝은 어디인지. 번짐. 두 음절이 이 단어 하나가 우주 아닌가? 시인은 그 우주를 발견하고 돌멩이 속으로 사라지는 모진 번짐 아니겠는가?

'이야기舍廊 > 詩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젖은 눈 / 장석남  (0) 2021.07.17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신경림엮음  (0) 2021.07.16
공손한 손 / 고영민  (0) 2021.05.27
긴 호흡 / 메리 올리버  (0) 2021.05.17
풀잎 / 월트 휘트먼  (0) 2021.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