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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건가.
가끔 바람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창비.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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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00 기념시선집에 실린 마종기시인의 詩 한 편.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인연들과 스쳤을까? 길거리를 걸을 때 내 곁을 지나친 사람들,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힘들어 온 마음을 곤두세워 내 숨결을 보낸 사랑했던 이,
손바닥을 대면 두툼한 대답을 들려주던 키 큰 나무들, 자꾸 뒤돌아보며 흘러간 강물같은 기억들.
지금도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은 그 지나간 시간과 생각과 마음을 내게 조금씩 새기고 갈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한 사람이 있었다. 시인은 그 귀와 더불어 울리는 마음까지 지닌 사람들이다. 시인의 귀와 마음은 그래서 늘 슬픈지 모른다.
바람부는 쪽으로 귀를 기울여보자. 오래전 다정했던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웃던 친구. 그 미소가 바람 속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창비시선 200호 기념 시선집. 신경림시인이 20년전에 엮어서 낸 시집이다. 초창기 창비의 정신이 서늘하게 살아있는, 그래서 지금은 좀 더 아쉬운 시인과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창비도 지금 창문을 열고 그를 꾸짖는 바람의 목소리를 들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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