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2습작

남은 오월

취몽인 2022. 2. 1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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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오월


사흘 동안 비 내렸다. 두 시간 거리의 숲속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처음으로 술을 남겼다. 컴컴한 언덕 위에 커다란 뿔을 가진 검은 사슴들이 그늘을 씹어 삼키고 있었고 뻐꾸기와 산비둘기가 안개처럼 흐리게 울었다. 젖은 종일을 몰고 집으로 돌아오니 가짜 배고픔이 몰려왔다.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메시지가 와있었다. 남은 한 주가 좀더 촘촘해졌다. 어둠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검은 사슴의 어깨가 자꾸 생각난다. 그는 그 좁은 곳에서 너무 큰 어둠이었다.

모란 작약의 때. 치장의 무게가 비에 젖어 고개를 꺽는다. 그 위에 짙게 뿌려지는 아카시 향기. 장미는 도발을 준비하고 내 집 수국은 색을 바꾼다. 도처에 꽃. 음란한 계절이 만발이다.

버스를 타고 독산동을 지난다. 오전 11시 길가는 중늙은이 이상의 시간. 햇살에 주름이 깊다. 예술가재난지원금이 들어왔으니 나는 예술가. 하지만 詩는 멀다. 허리굽은 노인 하나 내리고 버스는 정처없으니..

반쯤 읽은 시집을 덮고 가방에 넣는다. 막 깊어졌는데. 오후엔 누구를 만나야한다. 못 만날 수도 있다. 남은 시들은 기다림의 몫이다. 그래야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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