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集 신간] 김재덕 시인의 《나는 왼쪽에서 비롯되었다》
갈치를 바르며 자분자분 당신은 목에 걸린 기억을 뽑는다
글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경기도 안양에서 사는 김재덕 시인(1962~)이 귀한 첫 시집 《나는 왼쪽에서 비롯되었다》(곰곰나루 刊)을 보내왔다. ‘시인의 말’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래 묵은 삼류를
김시인이라 불러준 친구들 몇 있다.
시집은 언제 줄 거냐 물어
환갑에 주겠노라 했다.
약속을 지키게 돼서 다행이다.
시 쓴답시고 맨날 혼자 놀아
아내에게 미안하다.>
환갑이 되어 첫 시집을 낸 시인의 ‘약속’을 되새기며 서시 ‘곡즉전(曲則全)’을 읽었다. 곡즉전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문장이다.
‘굽으면 온전해지고 휘면 펴지게 된다’(曲則全, 枉則直)
등 굽은 소나무가 고향 선산을 지킨다는 말과 비슷하다. 지혜로움을 느끼게 한다. 단숨에 읽어 보았다.
곤두박이 바람들
잎 떨구고 갔나 보다
뼝대에 별빛 스밀 때
숙인 고개 추스르다
삐거덕
발목 접질린
굽은 무릎 소나무
가지 위엔 아직도
마르지 않은 새집 하나
한 번 더 날아오를까
얼기설기 어설픈 꿈
아직은
버텨야 한다
무릎 굽은 소나무
-김재덕의 ‘곡즉전’ 전문
시집 《나는 왼쪽에서 비롯되었다》
시인은 말한다. 아직은 버텨야 한다고. 그렇다. 환갑은 새롭게 시작하기에 전혀 늦지 않다. 스스로 ‘무릎 굽은 소나무’에 빗대고 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다. ‘휘면 펴지게 된다(枉則直)’는 것을.
시집의 두 번째 시는 표제시다. 어쩌면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라는 제목부터 풍성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봄날
국수 한 그릇 먹고
굽은 느티 어깨 드리운 평상에 앉습니다.
꽃잎 몇 닢 날립니다.
담배 한 모금
낯선 손님처럼 사라지는데
왼쪽 곁에
누가 앉습니다.
어느 봄날
꽃비 내리던 서소문공원에서
세월 참 더럽게 안 간다
먼지 뽀얀 질경이한테 분풀이하던
젊은이군요.
발밑에는
그날 곁에 있었던 그녀 눈물 한 방울
제비꽃으로 피어 있는데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젊은이
날 두고 포로롱
혼자 날아갑니다.
-김재덕의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 전문
다소 몽환적인 시다. 꽃잎이 날리던 어느 봄날, 평상에 앉았더니 한 젊은이가 다가와 화자(話者) 곁(왼쪽)에 앉는다. 그 젊은이를 보며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 시절, 누구나 그랬을지 모르는, ‘세월 참 더럽게 안 간다’며 몸부림쳤던 ‘우리’였다. 그 젊은이를 보며 사랑하던 이가 흘리던 ‘눈물 한 방울’이 떠오른다. 화자는 그 ‘한 방울’을 ‘제비꽃’으로 완성시킨 뒤 마지막 두 행 ‘날 두고 포로롱/ 혼자 날아갑니다’로 매듭짓는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가 현재, 혹은 미래까지 좌지우지 하게 만들면 곤란하다. 때로 기억이나 회상은 과거의 몫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갈치를 바르며
자분자분
당신은 목에 걸린 기억을 뽑는다.
등지느러미 아래 촘촘한
생가시 같은 지난날들.
바싹 구워져 비린내마저 고소하지만
희미한 핏빛은 여전히 어룽.
하얀 이밥 위로
아픔 한 토막 얹다가
다시 뽑는
가늘고 뾰족한 삼십 년.
글쎄, 그때 당신은 절대 내 편이 아니었다니까.
언제쯤
바늘 한쌈 다 뽑고
한입 가득 웃을 수 있을까
당신은.
-김재덕의 ‘가시’ 전문
시 ‘가시’는 아픈 기억을 노래하는 시다. 가시가 목에 걸리듯 아픈 기억에서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유로울 수 없음이 ‘시인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시 쓴답시고 맨날 혼자 놀’게 만들었으리라. 그런데 상처를 이제는 아름답게 볼 수 있을 만큼 깊어졌다.
‘당신은 절대 내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입 가득 웃을 수 있는’ 희망과 그리움은 분명 내편이었다. ‘가늘고 뾰족한 삼십 년’의 시간, ‘생가시 같은 지난날’의 수고로움이야말로 바로 갈치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완성시키는 (부차적) 조건이니까…. 갈치에게 가시 없음을 상상할 수 없으니 가시 바르는 일을 즐길 수밖에. 카르페디엠(Carpe Diem), 피할 수 없으면 현재를 즐겨야 한다.
이미 시인은 알고 있다. 비록 ‘언제쯤/ 바늘 한쌈 다 뽑고/ 한입 가득 웃을 수 있을까’라고 말하지만, 누구도 가시를 다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목에 걸린 가시 덕에 우리는 근근이 버티며 살아간다.
나를 바라보는 나,
나는 내분비 중이고
나는 넘치다 금방 고갈된다.
나를 불쌍하다 말하지 마라.
나는 사라지는 중인지 모른다.
-김재덕의 ‘갱년기’ 부분
죽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을 지워가는 일.
-김재덕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부분
김재덕 시인
시집을 해설을 쓴 한국교통대 한원균 교수(문학평론가)는 김재덕의 시집을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제의적 담론으로 읽힌다’고 했다. 그의 시 쓰기란 기억 속에 단단히 박힌 가시와 등 굽은 나뭇가지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곡즉전’이라 노래했듯 ‘낭창한 힘’을 믿는다. 이미 ‘포로롱’ 날아올라 깊은 상처와 가시를 넘어섰다. 그래서 앞으로의 시 세계가 더욱 기대된다.
병아리를 쥐듯
힘 빼고 쥐어야 합니다.
손목이 굳거든요.
끄트머리를 느껴야 해요.
몇 번 흔들어보면
멀리서 오는 표정을 볼 수 있어요.
휘청휘청한 얼굴 보이시죠?
그때 들어올리시면 돼요.
손에 쥔 병아리를 조심하세요.
뒤가 살짝 설레는 느낌 있나요?
가는 풀 위에 머뭇거리는 잠자리처럼
앉을 듯
다시 솟아오를 듯하는
망설임을 붙들어야 해요.
그때 뿌리치면 됩니다.
병아리가 숨막히지 않게
그렇지만 놓치지 않게 던지세요.
앞을 향해
-김재덕의 ‘낭창한 힘’ 부분
http://m.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5401&Newsnumb=20220515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