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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보청기, 귀의 힘

취몽인 2022. 6. 18. 10:04

귀의 힘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평생 함께 사는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집에서는 입에 거미줄 칠 정도라고 한다. 경상도 남자라 집에서는 더 말이 없는 탓일 것이다. 예전부터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경상도 남자가 집에 와서 하는 말 세 마디. ‘밥 묵자. 아는? 자자.’ 실제로 이런 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늘 입을 닫고 사는 것은 아니다. 고객과 상담할 때는 열심히 말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친구들과 어쩌다 한잔할 때는 제법 수다도 떤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과묵한 편인 것 같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네 기억으론 중학교 입학할 무렵까진 제법 말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 짝사랑하던 여학생으로부터 ‘너는 말이 너무 많아 싫어.’ 라는 말을 듣고 제법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말을 줄이려고 애썼던 것 같다. 고금 이래 사랑은 가장 강력하게 사람을 바꾸는 힘이다.

갑자기 말을 줄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다른 사람의 말을 열심히 듣는 일이었다. 내 말을 하는 대신 상대의 말을 듣자는 생각이 어떻게 들었는 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때부터 듣는 일에 좀 더 집중을 하게 되었다. 먼저 지겹기 짝이 없는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듣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건 제법 효과가 있었다. 그 무렵 들은 신에 관한 이야기가 이후 내 평생 삶의 한 기준이 되었고 더불어 나는 말이 없는 사춘기 중학생이 됐다. 그 여학생은? ‘넌 재미가 없어.’ 라는 말로 또 한 번 내게 큰 좌절을 남겼다.

그후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말수는 더 줄어든 것 같다. 부작용은 나중에 드러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말수가 적은 것이 사회 생활에 다소 약점이 된 것이다. 거래선과 만나도 주로 듣기만 하는 편이니 상대방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불편해 했다. 그리고 사내 회의 시간에도 내 의견을 표하기 보다는 주로 듣기만 하니 소극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기 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주로 듣다 보니 의외의 성과가 생겼다. 회의 참석자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숱한 이야기 속에 그 회의에서 도출해야 할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결국 긴 회의 시간 동안 별 말을 하지 않았던 내가 마지막에 결론을 짓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듣기는 통찰과 직관의 훈련에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다.’ 는 말이 있다. 우리는 눈 뿐만 아니라 입을 통해서도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다. 내가 알고 싶은 많은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속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잘 듣기만 하면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이 그 속에 다 들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경험은 이후 오랫동안 광고대행사 생활을 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아이디어, 아이디어. 광고대행사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지루한 회의가 이어지는 곳이다. 브레인스토밍을 하기도 하고 각자 자리 앞에 수북하게 책을 쌓아 놓고 뒤지며 아이디어를 찾기도 한다. 그러면서 던지는 수많은 말들이 광고아이디어 회의의 전부다. 말을 꺼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아이디어에 목마른 건 마찬가지인데 이때 잘 듣는 능력이 있으면 의외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누군가 무심히 뱉은 말 몇 마디가 서로 상승작용을 해서 결정적 아이디어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걸 제대로 듣고 잡아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때 잘 듣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역할을 하곤 한다. 말 대신 귀를 갖고 있던 나는 자주 그 어부지리를 내 성과로 만들곤 했었다.

보청기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요즘에도 듣기는 관운장의 청룡은월도가 되고 있다. 보청기센터를 찾는 고객은 기본적으로 듣기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듣기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기에 듣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더 잘 헤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난청인의 듣지 못하는 불편을 헤아리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분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일이다. 잘 듣지 못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듣지 못하는 일의 고통, 그것이 난청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어쩌면 듣지 못한다는 사실 이상으로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 호소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담의 절반은 끝난다. 하소연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맞장구를 치다 보면 고객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보청기를 통해 잘 듣게 해주는 일은 그 다음 기술적인 일에 불과하다.

‘듣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죠. 잘 들으려면 상대와 연결되어야 해요. 듣기는 연결의 핵심이에요. 그저 듣는 시늉만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실은 전혀 듣지 않고 어떻게 대답할지 궁리하면서 기다리는 거죠. 이건 대화를 통해 통제하려는 행동이에요. 진정한 듣기는 통제를 포기하는 것,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이에요. 경청은 강력해요. 그 어떤 상호작용보다 중요하죠.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주변과 연결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줄리아 캐머린 <아티스트 웨이> 비즈니스북스. 2022.)

내 입을 닫게 한 짝사랑 여학생도 지금은 환갑 나이의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내게 던진 한 마디는 내 귀를 열었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귀는 내 삶의 엄청난 자산이 되었다. 비록 사랑 하나를 놓쳤지만 듣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 그녀에게 오래 동안 감사하고 있다. 그녀는 내게 귀의 힘을 전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