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詩를 써야 詩가 되느니라> 서정주 / 방민호 외

취몽인 2011. 5. 26. 13:54

 

 

 

 

 

 

 

 

 

 

 

 

 

 

 

 

 

 

미당의 詩론을 적절한 詩들을 통해 쉽게 전달하고자 씌여진 책.

좋은 책인 듯, 좋은 기획 의도인 듯 하다.

 

 

<詩란 무엇인가?>

 

"단면의 전체성" 詩란 형식은 단순한 것이고 그 내용은 단면을 그리되 전체가 보이도록 한 것.

"언어는 적으면서 사상은 더 큰 것"

 

詩의 공리성이란 무엇보다 그 예술적 완성이 주는 미적 감흥에서 찾아야 한다.

詩에서 사상은 "논리적 기술"이 아니라 "시인의 한 생리적 질서와 그 관문을 통과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생경한 논리적 조작의 차원에서 벗어나 시인의 생리적 차원에까지 육박해 들어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詩的 논리로

새롭게 탄생한 것만이 詩에서는 참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詩에서 詩的 언어의 표현 대상이 되는 사물, 물상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피부에 접촉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그러한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 있다.

저 너머의 차원은 실재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실재하는, 또 실재하는 것 것 같으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詩的 표현의 순간 속에서만 살고 사라지는 이것은 마치 미당이 이야기 한 '생명이라는 정체불명의 근원'과도 같다.

 

"불완전한 언어가 우주를 대변하는 것, 언어의 제약이 정신의 비약을 주는 점이 詩의 묘처"

 

독자는 좋은 詩를 통해 긴 '여운'을 느끼며, 그러한 여운은 시인의 '전인격적인 체험'이 담긴 소리일 때 가능해진다.

 

 

<詩에 어떻게 다가갈까?>

 

"시인 자신이 간절히 감동한 것, 그것을 가지고 詩를 쓰라."

 

송재학시인은 예술의 세계, 불교의 세계가 가진 형이상학적 가치를 색채와 소리의 이미지로 '번역'하는 능력이 탁월한 시인이다.

 

"美的 密度" -- 메시지가 절박한 만큼 詩는 치밀하고 강력한 표현의 전략을 궁리할 필요가 있다.

 

가슴으로 와 닿은 어떤 느낌의 총체와 대화를 하며 이것을 詩의 어떤 단계로 옮기는 과정이 괴로울 수 없다.

그 느낌을 어떤 언어로 옮길까 하는 고민 자체도 詩 쓰기의 즐거움에 속하기 때문이다.

 

詩에서의 지성은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리는 지성'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외면할 때 詩가 막연해지고 팍팍해진다.

 

 

<詩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으니..>

 

詩 작품엔 어느 것이나 반드시 그 詩의 눈이 있어야 한다. 초점이라고 하는 것 말이다. 

... 요컨대, 詩 정신의 클라이맥스. 그것을 나는 말하려는 것이다.

 

감동이 주는 침묵을 기호화해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성급하게 글로 옮겨서는 좋은 詩가 나오기 힘들다. 주제와 소재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자라서 열매처럼 맺히기 때문이다.

 

詩는 詩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고 있는 말을 기초로 해서 구성해 내는 암시의 신기루에 아무래도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詩의 낱말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빈 공간이 아니라, 말보다 훨씬 더 큰

감칠맛을 갖는 암시의 매력들이어야 한다.

 

 

<詩의 언어>

 

詩에 있어서 언어의 선과 색채는 언어를 묘리 있게 조화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詩의 리듬과 멜로디는 언어를 묘리 있게 배열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식과 리듬>

 

詩의 정형화는 과거의 정형시 형식을 답습하는 데서 되는 게 아니라, 완전히 현대인을 律할 수 있는 한

새로운 詩의 정신과 그 출렁임으로서의 운율을 마련하는 데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맥락을 기준으로 잡다한 연상들을 경지정리하는 것이 유기적 연관성으로 다가가는 첫걸음이 된다.

 

 

<詩적 수사>

 

詩가 생명를 가지게 하는 것은 정신이거니와 그것을 표면으로 유도하는 것은 기교인 것이다.

 

 

<이미지>

 

詩는 음악의 추상성과 문학의 구체성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긴장이 생명이고 따라서 추상적인 음악성만큼이나

표현의 구체성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때의 구체성은 음악을 유지할 수 있는 구체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구체성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詩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리듬을 유지시키면서 문학으로서의 표현의 구체성을 획득하게 하는 영약과도

같은 요소인 것이다.

 

절제는 그 자연으로 사랑을 낳아 사물에게 그 사랑을 보내게 하고, 그 사랑이 가서 늘 어루만져 주면 사물들은 또 자연 같이

우리에게 그 감추었던 곳을 전부 드러내 '당신이 바른 주인'이라고 하며 가까이 온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세계에 있는

것들의 제일 우수한 이미지 촬영사의 자격 - 시인의 제 1 자격을 갖는 것이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예술사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익숙한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 속에 수확된 이미지들 속에서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보편성을 지닐 이미지를 선택하는 데 달려 있다.

 

청각적 이미지의 암시력을 활용하라.... 'R L의 유음'   '푸름' 과 '슬픔'의 청각적 'ㅍ'의 연결...

 

 

<詩의 유형>

 

情操의 詩,

사물이란 이성적인 요량과 아울러 한결같은 항정을 줌으로써만 정말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것을 지금 이곳의 한계를 넘어서서 영원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

 

 

<詩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정신 현실 전체가 바로 고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詩가 될 수 있다.

 

시인이라면 그의 시상의 간절성 때문에 어떠한 언어의 기성복도 걸치기를 거부하고 영원히 맞닿을 곳 없는 파도처럼

서성거리며 부절히 소원하고 모색함으로써만 詩의 이미지들이 비로소 아는 체를 하고 가까이 오던 기억을 얼마든지 갖고 있을 것이다.

 

체험을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이란 단순한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해나가는 실체로서의 주체의 육체와 영혼이

합일된 깨달음, 즉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경험이 선사하는 선적인 깨침이다.

 

내면의 괴로움이 깊을수록 절제하라.

 

 

<詩와 사상은 어떤 관계인가>

 

詩는 감각적인 쾌감의 단계를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울림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진짜 훌륭한 詩는 마치 하늘을 열어젖히는 것처럼 사람들오 하여금, 세계인식, 자기 인식의 한계를 타파할 수

있도록 해주는 詩다. 인식의 한계, 벽에 도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훌륭한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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