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詩 그리고 희망 (2012. 1. 2)
2012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병인년이니, 무술년이니 하는 육십갑자에는 둔감하다. 어떤 사람을 만나 '나는 쥐띱니다.'라고
자기 연배를 소개하는 경우에 맞닥뜨리면 그 사람의 나이를 정확히 짐작할 수 없어 낭패감에 빠진 적도 많다.
그렇다보니 2012년이 무슨 해인지를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용띠해라는 것만 알고 있다. 나이가 쉰인데 이런
무지(?)도 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군 데 보낸 신춘문예 원고는 최종심에도 오르지 못하고 탈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연한 결과임에도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내 詩가 서있는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 때문일 것이다. 새롭게 배운 환유적 수사를 적용해
본 몇 편의 詩, 그리고 젊은 선생의 상대적 격려가 괜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지만 사실 나 스스로도 그 詩들이 세상에
내놓을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여길 수 없다. 거듭 생각하지만 필연성이 없는, 재주만 조금 나아진 詩는 그 자체로
쓰레기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그 재주라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바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새해가 되었지만 터널의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호기를 부려보고, 밀쳐두었던 신에게 염치불구하고 사정을
해보기도 한다. 5%의 가능성을 향해 전화를 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답이 뻔한 계산을 어두운 마음 속에서 두드려 본다.
하지만 또 살아질 것이다. 살면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곤란함 속에서도 희망은 우리에게 도저한 울림으로 삶을
지탱시킨다는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내게 희망이란 그런 것이다. 벌써 쓰러졌어야 했지만 아직도 버티고 서있는 내
끈질긴 삶. 최악의 상황이 닥쳐 파산을 하더라도 나는 쉬 죽지 못할 것이다. 그럴 용기도 없을 것일 뿐더러 아직은 가족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빚을 더 쌓아가며 저주스러운 자본주의에 기대 그놈을 살찌우며 오지 않을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새해 첫 주에 릴케와 하이데거를 읽는다. '존재', 詩는 곧 존재와의 대화라는 생각을 강제적으로 하게 된다. 희뿌연
연기 속에 어렴풋한 이 '존재'의 개념. 이 모호함을 깨뜨려야 詩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적 언어,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모리스 블랑쇼의 환유적 사유 모두 그 뿌리는 존재와의 대화에 닿아있다. 그런데
존재의 개념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 형편으로는 이 좋은 텍스트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시론서로 파스와 바슐라르 그리고 하이데거를 추천한 김경주시인의 속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현대시가 사이 또는 차이, 거리에 집착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하이데거의 '존재 사이' 개념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될 것 같다. 상반기는 이런 이유로 하이데거를 공부하는 데 바쳐야할 것 같다. 어려운 만큼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다. 마이너스 경제 마저 흔들리는 형편에 詩 공부라니? 웃기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내게 詩는 모르핀이다. 아픔을 고스란히 머리에 담고 살 수는 없다. 잊어야 한다. 자꾸 생각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괴로울 뿐이다. 오히려 시간을 잘 나누어 먹고 살 일을 찾고 어차피 남아 도는 시간을 마음이 가는 일에
투자하는 것. 그렇게 밖에는 살 도리가 없다. 분명 나는 절망의 늪에 빠져있다. 하지만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버려지지도 않는다.
그러한 내게 詩는 절망과 희망을 잇는 사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