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다는 것
머리를 자르려
한 시간 일찍 나왔는데
늘 가던 미용실은 문을 닫았다
고스란히 길 위에 남겨진 시간
관성에 끌려 온 회시 앞
커다란 카페에 앉아
비싼 커피 한 잔
나희덕의 오래된 시 몇 편 읽는다
1997년이라니,
20년 전 나희덕이라니
삼십대였던 그녀는
애를 배기고 하고 식지못한 사랑이기도 하다
97년 이즈음
나는 필리핀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그곳에서 IMF 소식을 들었고
곧 돌아와 지금까지 이어진 나락을 시작했었다
20년전 마닐라와 만삭의 나희덕
그 앞에 앉은 쉰 중반의 택시기사
불쑥 오천원짜리 커피가 낯설다
어느새 내 속에 자리한 처지의 비난
'택시 기사 얼마 번다고 오천원짜리 커피냐?'
이십년은
서울서 마닐라의 거리만큼이나
나희덕의 다 자란 아이만큼이나
멀고 낡고 누추하게 길들여지기에 넉넉한 시간이다
18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