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택詩人

길들여진다는 것

취몽인 2018. 11. 13. 17:09

길들여진다는 것

 

머리를 자르려

한 시간 일찍 나왔는데

늘 가던 미용실은 문을 닫았다

고스란히 길 위에 남겨진 시간

관성에 끌려 온 회시 앞

커다란 카페에 앉아

비싼 커피 한 잔

나희덕의 오래된 시 몇 편 읽는다

 

1997년이라니,

20년 전 나희덕이라니

삼십대였던 그녀는

애를 배기고 하고 식지못한 사랑이기도 하다

97년 이즈음

나는 필리핀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그곳에서 IMF 소식을 들었고

곧 돌아와 지금까지 이어진 나락을 시작했었다

20년전 마닐라와 만삭의 나희덕

그 앞에 앉은 쉰 중반의 택시기사

불쑥 오천원짜리 커피가 낯설다

어느새 내 속에 자리한 처지의 비난

'택시 기사 얼마 번다고 오천원짜리 커피냐?'

 

이십년은

서울서 마닐라의 거리만큼이나

나희덕의 다 자란 아이만큼이나

멀고 낡고 누추하게 길들여지기에 넉넉한 시간이다

 

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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