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시인에게서
물 오른 가지의 충일을 빼앗았나?
무엇이 이 시인에게서
오솔길의 젖은 목소리를 거두어갔나?
가까운 이가 죽고
멀지 않은 역사 속에서 죽음을 당하고
겨우 몇 년 전 기막힌 죽음을 보고
서정은 코드가 되고만 것인가
아니면
도무지 켜켜히 쌓인 빚을 어찌할 수가 없어
한바탕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짐작할 수 없다
그저 시인의 다음 시를 기다려보는 수 밖에
그의 다음 목소리를 기다려보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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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감옥
그러니까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자유롭게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
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 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다니며 종이 부스러기나 삼키며 살아
왔다니
이 감옥은 안전하고 자유로워
방문객들은 감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간수조차 사라져버렸지 나를 유폐한 사실도 잊은 채
여기서 시는 점점 상형문자에 가까워져간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
종이에 박힌 활자들처럼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벽돌집이 순식간에 벽돌무덤이 되는 것처럼
종이벽이 무너져내리고
어느날 잔해 속에서 발굴된 얼굴 하나
종이에서 시가 싹트리라 기다리지 마라
그러니까 오늘, 이 낡은 방에서, 하루에 겨우
삼십분 남짓 해가 들어오는 이 방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는 것이 형광등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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