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파일명 서정시/나희덕

취몽인 2019. 6. 5. 16:23

 

누가 이 시인에게서

물 오른 가지의 충일을 빼앗았나?

 

무엇이 이 시인에게서

오솔길의 젖은 목소리를 거두어갔나?

 

가까운 이가 죽고

멀지 않은 역사 속에서 죽음을 당하고

겨우 몇 년 전 기막힌 죽음을 보고

서정은 코드가 되고만 것인가

 

아니면

 

도무지 켜켜히 쌓인 빚을 어찌할 수가 없어

한바탕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짐작할 수 없다

그저 시인의 다음 시를 기다려보는 수 밖에

그의 다음 목소리를 기다려보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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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감옥

 

 

그러니까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자유롭게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

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 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다니며 종이 부스러기나 삼키며 살아

왔다니

 

이 감옥은 안전하고 자유로워

방문객들은 감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간수조차 사라져버렸지 나를 유폐한 사실도 잊은 채

 

여기서 시는 점점 상형문자에 가까워져간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

종이에 박힌 활자들처럼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벽돌집이 순식간에 벽돌무덤이 되는 것처럼

종이벽이 무너져내리고

어느날 잔해 속에서 발굴된 얼굴 하나

 

종이에서 시가 싹트리라 기다리지 마라

 

그러니까 오늘, 이 낡은 방에서, 하루에 겨우

삼십분 남짓 해가 들어오는 이 방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는 것이 형광등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