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페이스북에 어느 집에서 키우는 누렁이를 학대하는 사진과 글을 올렸다. 순간 또 울컥했다. 화가 치민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을 저렇게 학대하다니. 저 강아지는 그래도 주인이라고 꼬리 흔들고 좋아라 할 때가 많을텐데, 정작 주인이라는 작자는 대충 키워서 잡아 먹던가 팔아버릴 생각을 하는 인간임이 틀림 없을거야. 같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었다.
그런데 나는 왜 화가 났을까? 모든 생명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긴 하지만 과연 내가 동물애호가 또는 생태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는데 말이다. 그저 그 분노는 내 마음 어딘가에서 6년째 집에서 키우고 있는 우리 강아지에 대한 애틋함이 솟은 탓이 아닐까? 만약 우리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화가 났을까? 냉정히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다. 결국 나의 분노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부분의 가치를 손상하는 다른 이를 보고 촉발된 방어기제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을 버리고 정착 농업 사회로 접어든 이래 대부분의 역사는 인간이 동물을 무자비하게 학대한 역사이다. 비록 약육강식의 법칙에 지배를 받았지만 대자연속에서 그들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살고 있었던 수 많은 동물(굳이 포유류에 한정할 것도 아닌, 곤충까지도)들이 그들 입장에서는 별 이유도 없이 도살되고 학대 당하고 심지어 멸종 당했다. 그 중 비교적 다루기 쉽고 유용성(순전히 인간 입장에서)이 높은 몇 종은 그들 삶의 터전에서 끌려나와 인간이 만든 울타리 속에서 삶과 죽음을 강제 당하는 운명에 놓였다. 개는 그 중 가장 오래됐고 닭, 소, 말, 돼지, 염소, 양 등 등이 가축이라 이름 지워져 인간에게 생명을 강제로 의탁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시골에서 큰 눈망을의 소를 본 적이 있다. 눈두렁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는 그 순하디 순한 눈을 보고 저 착한 생명이 매일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멀지 않은 시간에 죽임을 당하고 누군가의 밥상에 고깃덩이로 오르게 될 것을 생각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저런 멀쩡한 생명을 박탈해서 인간의 생명에 충당하는 짓이구나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저 잠시 스쳐가는 감상에 불과하고 불판에 지글지글 잘 익어가는 고기를 생각만 해도 침을 흘리는 게 대부분 사람의 모습이다. 그 식탁 앞에서는 그저 잡식성 동물의 본성에 충실할뿐 생명에 대한 미안함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그게 인간이다. 너무 오래 동안 자연에 대한 비도덕적 폭력에 익숙해진 지구별의 가장 강력한 가해자로서 충실할 뿐이다.
이런 우리가 강아지 한 마리가 학대 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모습은 다소 어이없는 넌센스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한 생명의 가치를 순전히 자기 기호 또는 가치로 편리하게 판단하고 그에 따라 즐거워 하고 분노하는 상황은 결국 절대 권력자의 이기심에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굳이 변명거리를 찾자면 그만큼의 안타까움이라도 다시 살아나는 상황에서 일말의 희망을 싹 틀 여지를 본다는 점이다. 동물과 함께 살면서 짙은 유대관계를 느끼는 반려동물 문화가 어쩌면 인류에게서 깡그리 사라져버린 더불어 사는 전 자연의 가치를 회복시켜줄 단초로 발전할 지도 모른다. 가족을 학대하고 잡아 먹을 수 없다 라는 반려동물 가족의 의식, 그 의식이 발전하면 더 넓은 자연 또한 함께 살아갈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때 지구적 생태계를 함께 지켜낼 수 있는 농경사회 이전의 자연 의식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리라 여긴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육식의 종말은 요원할지라도 예의 있는 육식의 시대가 회복되고 돌부리 하나에서도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회복할 가능성이 강아지의 눈물에 분노하는 마음에서 자라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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