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황금나무 아래서 / 권혁웅

취몽인 2020. 1. 7. 10:56

 

나이가 드니 무슨 일이건 과거를 소환할 때마다 시간의 단위가 너무 커서 당혹스럽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라고 말을 꺼낼 때 그 예전이 십 년 정도 지난 일은 보통이다. 미래보다 과거가 두꺼워진 탓이지만 문득 서글퍼지기도 한다.

 

'봄밤'이라는 유니크한 정서의 시로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한 때 시판을 휘몰던 젊은 시인들을 '미래파'라는 깔끔한 이름으로 정의했던 평론가인 권혁웅시인을 처음 접한 것은 역시 한 십 년전쯤 정동 경향신문사 빌딩에서 열리던 '김경주시인의 시창작교실'에서 였다.

 

그 자신 미래파였던 김경주시인이 첫째 시간이었나 둘째 시간이었나 기억은 흐리지만 '환유'와 '곁'을 이야기 하면서 프린트로 같이 읽어보자 소개 한 시가 바로 권혁웅시인의 '파문'이었다.

 

내리는 빗줄기들의 사이,

바닥에 생기는 동그란 파문들이 만드는 거리 또는 곁,

사람과 사람,

그 사이, 거리, 곁, 그리고 그 틈으로

희미하게 발생되는 라디오의 지지직 소리, 노이즈

뭐 그런 이미지들을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솔직히 권혁웅이 누구지? 잘나가는 김경주가 대표적 예로 초대한 시인이면 만만찮을텐데..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후 세월이 흘러 권혁웅시인의 여러 시들과 평론, 시 이론서들을 여러 권 읽을 기회가 있었다. 특별히 내게는 환유를 이해하기 위한 텍스트로 유용했었다.

 

하지만 '파문'을 다시 읽을 기회는 없었다. 그 시가 실린 시집이 무엇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최근에 전자도서관에서 전자책을 몇 권씩 빌려보게됐고 전자도서관엔 아직 시집이 별로 올라와 있지 않은 관계로 목록의 뒤에서 부터 시집을 찾던 중 이 시집을 빌리게 됐다.

 

그 시집 표지를 넘기자 떡 '파문'이 있었다.

권혁웅시인의 처녀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였다.

 

그간 많은 비가 내렸고

곁과 틈은 촘촘히 벌어졌지만

이렇게 라디오 지지직 소리처럼

이 책과 시는 내게 다시 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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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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