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 마종기

취몽인 2020. 4. 8. 16:00

 

몇 개의 虛榮

 

 

外國에 십년도 넘게 살면서

향기도 방향도 없는 바람만 만나다 보면

헐값의 虛榮은 몇 개쯤 생길 수 있지.

 

호박잎 쌈을 싸 먹고 싶다.

익은 호박잎 잔털 끝에

목구멍이 칼칼해지도록.

목포 앞바다의 생낙지도

동해의 팔팔한 물오징어도.

 

배가 부르면 마라돈도 뛰고 싶다.

6.25 전이었기는 하지만 매일 저녁 맨발로 뛰던

우물집 세천이와 생선 가게 광수랑 같이

창경원, 돈화문, 종로 삼가, 사가, 오가

숨이 차서 돌아오던 혜화동 로터리쯤.

 

이제 그런 세월이 아니라면

산보라도 하고 싶다.

유난히 이쁜 계집애 많던 명륜동 뒷골목을

아침이나 저녁이나 비슷하게 끓던 골목.

팍팍한 그 된장찌개도 먹고 싶다.

 

이제 알 듯도 하다.

돌아가신 先親이 다 던지고 귀국하신 뒤

아쉬움 속에서도 즐기시던 당신의 가난을,

가난 속에서 알뜰히 즐기시던 몇 개의 허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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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생. 올해 81세. 미국 사는 의사 시인.

마종기시인을 생각하면 늘 황동규 시인이 덩달아 떠오른다. 오래 끼고 닳도록 읽고있는 황시인의 시집속에 있는 버클리에서의 두 사람 모습이 오래 남아 있는 탓이다. 마시인의 아버지는 마해송, 황동규의 아버지는 황순원. 가히 우리 문단의 성골급 원로라 할 수 있을 듯. 박목월의 아들 박동규, 금수현의 아들 금난새 등과 함께. 먼저 성가를 이룬 부모를 둔 이들은 그 시대 찌들리게 살았던 다른 시인, 예술가들과는 정서가 다소 다를 것이다. 박통 시절 군의관 시국선언으로 미국으로 쫒겨간(제가 내용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배부른 자의 도피처럼 글을 썼는데 페친 한 분이 지적을 해주셔서 내용 고칩니다. 죄송ㅠ) 마종기와는 달리 의사를 포기하고 문학의 길을 택한 황동규의 경우일지라도.

 

시인의 마흔 무렵에 펴낸 시집. 이때 이미 미국에 살고 있지만 아직은 떠나온 제 나라에 대한 상처어린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국에서 터잡고 사는 고단함도 함께 담겨 점이지대처럼 느껴지는 시편들이 많다. 그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 선친에 대한 시편들이 눈에 띄고, 전쟁을 겪은 젊은 의학도이자 시인이었던 다소 복잡한 감수성의 시편들도 많다.

발문에 쓴 김주연의 말처럼 어렵지 않은, 私的 이야기들 속에서 보편의 의미를 끌어내는 詩들이다.

 

팔순 시인의 사십 년 전을 읽는 일이 지금 내게 어떤 의미인가?

떠날 준비를 하는 황동규시인의 詩들을 근자에 읽는 의미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시대의 역사를 더듬는 기분도 들고 지나온 내 삶을 자꾸 되짚어보게도 된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詩의 역사가 베푸는 부작용일까?

 

 

音樂會

 

 

1

 

드 뷔시의 등에

눈이 또 내린다

1950년 대의 막역한 친구들이

골바의 외로움을 털고 일어나

百合을 본다.

젊은 여자는 대체로

東洋이고 西洋이고

裸身이 더 매력적이지만

百合보다 더 어린 金髮의 꽃을

나는 固定시킨다.

 

2

 

靑年이 된 데이빗 오이스트라크가

音樂會場을 빠져 나와

바이얼린刑의 정구채로

창창하게 정구를 친다.

나는 決定的으로 대결한다.

휴게 시간에는

戰亂의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닦는다.

 

3

 

내가 술만 마신 軍隊시절에

분을 바른 孤兒들이

合唱을 하면서 나를 慰問했다.

모가지가 휘어지는 철모를 쓰고

나는 애매하게 慰問을 받았다.

시뻘겋게 단 當直室 난로에서

구스타브 말러의 魂이

벌써 石炭이 되어

뜨겁게 뜨겁게 타는 것을 보고

꽝꽝 얼어붙은 地上에도

불꽃이 퍼지기를 몰래 기다렸다.

 

1980년 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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