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취몽인 2020. 4. 8. 16:01

 

강요 Przymus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는다.

사망한 양배추를 곁들인 돼지고기 사체(死體).

모든 메뉴는 일종의 부고

 

가장 고결한 사람들조차

죽임을 당한 뭔가를 섭취하고, 소화해야 한다.

그들의 인정 많은 심장이

박동하는 걸 멈추지 않도록.

 

가장 서정적인 시인들조차 그러하다.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자들도

끊임없이 씹고, 삼킨다.

한때는 성장을 지속했던 어떤 대상을.

 

나는 이 대목에서 위대한 신들과 화해할 수가 없다.

혹시 그들이 순진무구하다면 모를까.

그들의 귀가 얇아서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을 자연에게 넘겨준 거라면 모를까.

그리하여 광란에 휩싸인 자연은 우리에게 굶주림을 선사하고,

굶주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결백은 종말을 고한다.

 

그 즉시 배고픔을 향해 모든 감각들이 달려든다.

미각, 후각, 그리고 촉각, 그리고 시각.

어떤 요리를 먹는지,

어떤 접시에 담겨 나오는지 도저히 무관심할 수 없기에.

 

심지어 청각도 동참한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 속으로,

식탁에서 유쾌한 대화가 오가는 건 흔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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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쉼보르스카.

2012년 세상을 떠난 폴란드 시인. 1996년 노벨문학상.

 

이 시집 '충분하다'는 시인의 타계 직후인 2012년 유고시집으로 출간됐다고 한다. 쉼보르스카의 시에 대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에서 삶의 비범한 지혜를 캐낸다. 사물의 현상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단정 지으려 하지 않고, 고정관념을 과감히 벗어던진 채, 투철한 성찰의 과정을 거쳐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시인' 이라는 평이 실렸다.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시 창작 이론서에 나오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정말 따라하기 힘든 그 기본.

 

사물을 대할 때 인간 중심의 잣대를 버리고 사물의 본성과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자 하는 시인의 노려과 시각은 거의 모든 시에서 느껴진다. 그 결과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시인은 시는 번역시로는 드물게 편하게 읽힌다. 공감도 쉽고 울림도 따뜻하다. 역시 기본의 힘일지 모른다. 내가 오래 좋아하는 황동규, 장석남 시인이 펼치는 안온함의 울림이나 적막, 쓸쓸함의 느낌과는 또 다른 반듯한 시선에서 느끼는 편안한 통찰을 느낄 수도 있었다.

 

시인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것, 사물이 지닌 본연의 가치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것, 그것이 시인의 진정한 사명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는 또 쉼보르시카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쉼보르스카의 작품 속에는 위대한 작품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뭐라 이름지을 수 없는 '위안'의 정서가 녹아들어 있다'. - 동료 시인 자가예프스키

 

그래, 그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잘 지낸 시인이 세상을 대신해서, 세상의 속을 따뜻하게 들추며 내게 전하는 '위안'이었다.

그 위안을 더 느끼고 싶어 보지 못한 시인의 시집 몇 권을 얼른 주문했다.

 

2016년 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