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즐거운 일기 / 최승자

취몽인 2020. 4. 8. 16:02

 

 

 

가을날 사과 떨어지듯

아는 얼굴 하나 땅 속에 묻히고

세월이 잘 가느냐 못 잘 가느냐

두 바지가랑이가 싸우며 낡아 가고

 

어이어이 거기 계신 이 누구신가,

평생토록 내 문 밖에서

날 기다리시는 이 누구신가?

 

이제 그대가 내 적이 아님을 알았으니,

언제든 그대 원할 때 들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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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문지.

책 모퉁이는 바랬고 활짝 펼치자

제본이 장작처럼 쫙 갈라진다.

인쇄도 참 오랜만에 보는 활판.

타자기로 찍은 듯한 글자들이 뭉게진 것도 많다.

 

1984년.

시인은 서른 셋. 그때 나는 스물 셋.

 

시인은 죽음을, 고통을 씹고 있었고

나는 방탕에 생을 말아먹고 있었다.

십년 뒤 내가 시인의 나이가 됐을 때,

나는 쓰레기통에서 겨우 기어나오기 시작했었다.

 

국가대표 여자시인이라 불렸다고 하는 시인.

기형도의 표정과 김수영의 목소리가 섞인

시인의 詩들.

 

36년이 지난 지금

시인은 아직도 고통 속에 있다는 소식.

나는?

고통마저 부러운.. 찌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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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삼 년 동안 두번째로

 

 

삼십 삼 년 동안 두번째로 나는

나로부터 도망갈 결심을 한다.

우선 머리통을 떼내어

선반 위에 올려 놓는다.

두 팔과 두 발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몸통을 떼내 의자에 앉힌다.

오직 삐걱거리는 무릎만으로 살며시 빠져 나와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오래 달리고 달려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

가만히 쉬고 싶을 때,

저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간다.

그에게 달려가 동정을 구한다.

그 품에서 잠시만 쉬게 해달라고,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품에서

가볍게, 풍선에서 공기빠지듯

가볍게 죽게 해달라고.

그는 못 들은 체하며 걷는다.

나는 또다시 그에게 동정을 구걸하고

이윽고 마지못해, 귀찮다는 듯

그가 나를 뒤돌아볼 때

 

그것은.....

짓 뭉개져 버린 나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