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취몽인 2020. 4. 29. 18:58

 

 

 

내가 산 담배 한 갑과

컵라면에 소주 한 병이

오늘 매상의 전부일 것 같은

유원지 매점과

 

'필름 팝니다' 깃발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버드나무 그림자나

종일토록 낯짝에 찍고 있는

강물과

 

꽃그늘 평상에 앉아

지갑 속의 사진을

꺼냈다 넣었다,

저무는 해를 맞고 있는 사내와.

 

 

 

십 수 년 전 청계천 헌책방 너댓 군데를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베르나르 뷔페가 삽화를 그린 프랑소와즈 사강의 오래된 책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런 횡재가 없었다. 흑백 인쇄에 어설픈 중철. 낡은 만화책과 다름 없는 모습이었지만 사강의 예민한 죽음과 뷔페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있어서 그랬다. 한참 뒤 블로그에 올린 내 글을 보고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었다. 그 책 '독약'을

새로 펴낼 계획인데 좀 빌려달라고 했다. 사진으로 찍어 보냈고 이듬해 새 책이 한 권 집으로 배달되어 왔었다. 지금은 그 독약 두 권이 나란히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 것이다.

 

중고서점은 발품을 팔지 않아도 가끔씩 귀한 책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미덕이 있다. 가까웠으면서 낯 선 시인 윤제림의 옛 시집은

이제 쉽게 구할 수 없다. 대단히 유명한 시인이 아닌 탓도 있겠고 그리 많은 시집을 내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이십 년 전 시집이 어느 중고 사이트에서 몇 만원에 팔리고 있기도 하니 가치는 인정 받은 셈인가? 어쨌던 장터에 새로 나온 시집을 기웃거리다 시집 한 권 건졌다. 이건 뭐 2012년판이고 3,400원. ㅎㅎ. 이 또한 작은 횡재 아니겠는가.

 

詩는 여전하다. 시인의 말처럼 낡거나 모자란 것들을 무심한 애정으로 바라보고 이야기 한다. 때로는 판소리 가락에 기대, 때로는 불교의 연기에 기대서. 조금 다르다면 낡거나 모자란 표정을 소외된 다문화 가정, 특히 타국으로 시집 온 동남아 여인들에게서 많이 발견했다는 소재적 차이점 정도랄까.

 

요란하지 않아 좋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길 가에 핀 이름 없는 풀꽃을 바라보듯 이야기 한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詩들을 읽으면 아무렇지 않게 슬프다.

 

시인은 그저 정림사지 오층 석탑을 보러 불쑥 부여를 자주 간다고 한다. 그 연인을 자주보고 싶어 매표원이 되었음 하는 마음도 내비친다. 쉬는 날 나도 부여를 가볼까 한다. 정림사탑 보러. 그리고 그 곳에서 시인의 무심한 여백의 깊이를 좀 베낄까 해서..

 

 

가정식 백반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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