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 싸리재 어떤 목련나무 아래서
답동 싸리재 조흥은행 뒤꼍에 갔더니 번잡한 게 싫은 햇볕이며 봄바람결들이 비단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담 옆에는 오래된 목련나무 한 그루가 이마를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네는 손처럼 꽃망울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당신 부끄러움 좀 어디 봅시다 하는 격입디다그려. 먼 유곽의 처마 밑에나 있을듯싶은 사나운 허무들 저 목련이 나중에 한꺼번에 지는 것도 꼭 그것만 같을 것을 나는 미리 알아 허무한 것과, 울렁거리는 것과, 은은하고 어룽어룽한 뒤꼍을 나와 하늘을 바라보며...... 어디로 남모르는 데로 좀 갔으면, 가서 눈도 좀 지그시 감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끝내 저녁별을 따라나서고 마는 긴 내 그림자처럼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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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의 詩를 읽으면 자주 낮달이 떠오른다. 그의 시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낮달. 그믐을 향해가는 가느다랗고 창백한 낮달은 그 자체로 적막하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은 낮달. 하늘은 파래도 좋고 희끄므레 해도 좋다. 달의 윤곽이 다 지워졌어도 좋고 바람이 아주 조금 불어주면 더 좋다. 그저 그 자리에 무심히 떠있는 낮달은 세상을 무심히, 그러나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기어이 들판에 부는 바람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같다. 밀물이 들어도 썰물이 나가도 그저 맨머리를 적셨다 말리며 조금씩 더 둥글어지는 조약돌처럼 그의 시는 조용히 둥글다. 세상은 여기저기서 어룽어룽대는 곳이어서 시인의 눈이 닿는 모든 곳과 모든 것은 미지근하게 웃거나 슬그머니 돌아 눕는다. 그리하여 수년째 그의 시를 사모하는 나같은 사람들 마음에 살짝 금간 낮달 하나씩을 긋고 그저 피식 웃으며 따뜻한 바람 몇 줄기 던져 혼자 왼손을 쓰다듬어보게 하는 것이다.
1999년에 낸 시집을 다듬어 10년 뒤인 2009년에 다시 냈다 한다. 그리고 다시 10년. 그는 여전히 천천히 부는 바람이거나 뒤란 감나무에 걸린 낮달의 다 지워진 빛으로, 미소로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추고 있다.
2009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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