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대학에 들어갔다. 공부는 안하고 종내 술만 먹다가 3학년때 상대 학생회지 편집장 벼슬을 했다. 글 쓴다고 껍적댄 덕이었다. 그때 배일환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쌍꺼풀이 곱고 얼굴이 동그란 친구는 조용필의 한오백년을 잘 불렀다.
어느 날 같이 술 먹고 대명동 일환이 집에 갔다. 아파트 문간에서 일환이 형과 마주쳐 인사를 했다. 나중에 일환이가 말했다. 내 고등학교 선배이고 년전에 등단한 시인이며 학교 선생님이라 했다. 그 후 다시는 뵐 기회가 없었다. 찾아보니 고등학교 문예부 선배님이시기도 했는데 모임에는 나오시지 않았다.
얼마전 페북에서 선배의 시집을 만났다. 선배를 만난 셈이다. 2006년에 나온 시집이었다. 늦었지만 샀다. 인사하는 마음으로.
경북 성주, 가야산의 북쪽 동네. 동네에서 보면 남쪽에 버티고 선 가야산, 선배는 그곳에 살고 계신가 보다. 일환이 고향이 성주였구나. 시집에는 가야산과 성주의 시골 마을, 그리고 읍내가 오래된 느티나무나 푸짐한 돼지국밥, 멀지 않은 날들의 기억들로 버무려져 있다. 지워져가는 것들을 끄집어내 두런두런 이야기를 건내는 시인의 목소리로..
그리고 선생님, 평생 제자들과 더불어 산 오목조목한 사랑의 역사가 있다. 자랑하지 않지만 자랑스러운.. 다른 길은 흙냄새 나는 사람과 세상의 속사정들이나 쓰다듬는 손길같은 시들로 채워져 있다. 편안하면서도 미안해지는 그런 풍경들과 생각들..
일환이는 뭐하고 있을까? 요즘은 무슨 노래를 잘 부를까?
페북에서라도 선배에게 인사를 드려서 다행이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하는 답글. 가야산 자락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생애의 별들
서른을 채워 결혼하는 아이 덕에
벌써 두 아이 엄마가 된 아이도 오고
아직 좋은 사람 없다며 선하게 웃는 아이도 와서
밥 먹고 술 몇 잔씩 나누고 헤어졌지만
돌아와 눈 감으면 어룽대는 것은 있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차마 부끄러워 딴 애들처럼
교무실로 복도로 찾아 오도 못하고
교문 떠나는 내 뒷모습 훔쳐보며
목련잎 그늘에 숨어 울기만 했다고
오래 묵은 사랑처럼 털어놓고는
가슴이 조금 시원한 듯 웃는 아이,
- 선생님, 그땐 다들 힘들었어요
아이가 다섯 살이나 된 아이가 말했다
- 오냐오냐, 내 다 안다
내 음성은 토란잎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그렁그렁 매달려 떨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굳게 입 다문 쇠교문에 매달려 울던 아이들
언젠가는 꼭 한번 빌고 빌어
용서받겠노라고 다짐했던 나 먼저
가던 길 지쳐 허덕일 땐 언제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아픈 채찍들
나눠 가진 상처 때문에 더 자랑스러운
내 생애의 별이 된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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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가야산
눈 덮힌 가야산에 새벽 햇살 점점이 붉다
직선에 가까운, 굵은 먹을 주욱 그어
하늘 경계를 또렷히 판각하는 지금이
내가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장엄한 순간이다
그 앞에선 언제나 엎드리고 싶어지는
저 산의 뿌리는 쩡쩡한 얼음 속처럼 깊고 고요해도
곡괭이로 깡깡 쳐보면 따뜻한 생피가 금세 튀어올라
내 얼굴 환히 적셔줄 듯 눈부신데
사람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언제쯤일까, 저 산과 내가 가장 닮아 있을 때는
-배창환 <겨울 가야산>. 2006. 실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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