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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2020년의 절반이 지났다. 간당간당한 직장생활은 용케 유지되고 있고 어머니가 부쩍 쇠약해지셨다. 그렇게 세월은 간다.
올해의 책 읽기도 반환점을 돌았다. 년초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에 관한 책을 뒤적인 걸로 시작한 책 읽기는 지금 이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에 머물고 있다. 늘 그렇지만 어떤 주제를 정해 놓고 시작한 독서는 어느 시점인가에서 보면 아주 다른 곳에 와있곤 한다.
애초 생각했던 독서의 줄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오래 공부중인 '詩와 예술'을 기본으로 '과학과 神', 그리고 '녹색경제'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자 마음 먹었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연이어 읽고 시집과 시론들을 꾸준히 읽었다. 슬로우라이프는 법정스님 추천 책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변 책으로 옮아가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 틀안에 머물 수 있었다.
삼월을 지나며 갑자기 노자의 도덕경을 몇 쪽 다시 읽으면서 궤도는 헝클어졌다. 최진석의 노자 읽기와 강신주의 노자 읽기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책 읽기의 중심은 느닷없이 노장을 거쳐 장자 읽기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장자의 길에서 강신주 특유의 짝짓기에 홀려 데리다 푸코 보들리야르 등 헷갈리는 유럽 철학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 늪에서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아마도 '과학과 神'이라는 과제와 '녹색경제'는 그렇게 뒤죽박죽으로 대체되고 말 것으로 보인다.
詩는? 젊은 시인들의 세상에 또 달려들었다가 다시 나자빠지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호흡의 시인들만 다시 찾아 읽다가 최근엔 이성복 詩 모조리 다시 읽기에 나선 중인데 잘 될까 모르겠다. 쉼보르스카를 비롯한 비교적 가까운 시절의 외국 시인들도 조금씩 읽는데 속도는 잘 나지 않는다.
컨디션이 좋지않아도 뭔가를 읽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증 때문에 짬짬이 에세이를 읽기도 했다. 김영하, 이기주, 김훈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쓴 에세이들을 오가며 아니면 일 하는 막간에 심심풀이로 읽고 클래식 안내서 몇 권, 시인들의 시론 비슷한 에세이도 읽다 얼마 전 둘째의 책장에서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을 꺼내 읽은 후부터 또 손이 그쪽에 붙어 지금까지 하루키만 네 권째 읽고 있다.
결국 숙제처럼 읽는 詩를 빼고는 반년만에 내 독서는 원래의 길을 읽고 제멋대로 떠돌고 있는 셈이다. 뭐 나쁘지는 않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더라도 책 읽기 정도는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좋지 않나 싶다. 의외로 한 권의 책을 읽으며 그 책이 권하는 다음 책을 따라가는 독서는 재미있다. 책으로 이끄는 동인이 살아 있는 가운데 다음 책을 펼칠 때의 기쁨이 나름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사무실에서 유홍준의 신간 시집과 쉼보르스카 전집을 읽고 있으며 이동 간 또는 외출의 자투리 시간에는 이성복을 읽는다. 집에서는 데리다와 들뢰즈를 곁에 두고 있는데 조금 읽으면 머리가 아파 하루키에게로 자주 도망을 친다. 화장실에서는 오 년 넘게 그 자리에 놓인 황동규 시선집을 쭈글쭈글해지도록 읽고 있으며(그런데도 그걸 통째로 외우지 못하는 내 메모리가 신기하다.) 근자에 차라투스트라를 옆에 뒀는데 변비를 염려해서 많이 읽지는 못한다.
얇은 시집들이 다수 포함됐지만 반 년 동안 대략 120권 정도를 읽은 것 같다. 사흘에 두 권.. 머리에 남은 건? 물론 없다! ㅎㅎ 그냥 스쳐 지나갔을뿐. 제가 필요할 땐 나오겠거니 생각한다. 앞으로 반 년 나는 또 어느 쪽으로 이끌려 가 무슨 책을 읽게 될까 궁금하다. 분명 내가 나서는 길인데 목적지는 알 수 없는,
이것도 여행이라면 여행 아니겠는가?
20200705
책 여행
2020년의 절반이 지났다. 간당간당한 직장생활은 용케 유지되고 있고 어머니가 부쩍 쇠약해지셨다. 그렇게 세월은 간다.
올해의 책 읽기도 반환점을 돌았다. 년초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에 관한 책을 뒤적인 걸로 시작한 책 읽기는 지금 이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에 머물고 있다. 늘 그렇지만 어떤 주제를 정해 놓고 시작한 독서는 어느 시점인가에서 보면 아주 다른 곳에 와있곤 한다.
애초 생각했던 독서의 줄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오래 공부중인 '詩와 예술'을 기본으로 '과학과 神', 그리고 '녹색경제'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자 마음 먹었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연이어 읽고 시집과 시론들을 꾸준히 읽었다. 슬로우라이프는 법정스님 추천 책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변 책으로 옮아가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 틀안에 머물 수 있었다.
삼월을 지나며 갑자기 노자의 도덕경을 몇 쪽 다시 읽으면서 궤도는 헝클어졌다. 최진석의 노자 읽기와 강신주의 노자 읽기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책 읽기의 중심은 느닷없이 노장을 거쳐 장자 읽기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장자의 길에서 강신주 특유의 짝짓기에 홀려 데리다 푸코 보들리야르 등 헷갈리는 유럽 철학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 늪에서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아마도 '과학과 神'이라는 과제와 '녹색경제'는 그렇게 뒤죽박죽으로 대체되고 말 것으로 보인다.
詩는? 젊은 시인들의 세상에 또 달려들었다가 다시 나자빠지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호흡의 시인들만 다시 찾아 읽다가 최근엔 이성복 詩 모조리 다시 읽기에 나선 중인데 잘 될까 모르겠다. 쉼보르스카를 비롯한 비교적 가까운 시절의 외국 시인들도 조금씩 읽는데 속도는 잘 나지 않는다.
컨디션이 좋지않아도 뭔가를 읽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증 때문에 짬짬이 에세이를 읽기도 했다. 김영하, 이기주, 김훈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쓴 에세이들을 오가며 아니면 일 하는 막간에 심심풀이로 읽고 클래식 안내서 몇 권, 시인들의 시론 비슷한 에세이도 읽다 얼마 전 둘째의 책장에서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을 꺼내 읽은 후부터 또 손이 그쪽에 붙어 지금까지 하루키만 네 권째 읽고 있다.
결국 숙제처럼 읽는 詩를 빼고는 반년만에 내 독서는 원래의 길을 읽고 제멋대로 떠돌고 있는 셈이다. 뭐 나쁘지는 않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더라도 책 읽기 정도는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좋지 않나 싶다. 의외로 한 권의 책을 읽으며 그 책이 권하는 다음 책을 따라가는 독서는 재미있다. 책으로 이끄는 동인이 살아 있는 가운데 다음 책을 펼칠 때의 기쁨이 나름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사무실에서 유홍준의 신간 시집과 쉼보르스카 전집을 읽고 있으며 이동 간 또는 외출의 자투리 시간에는 이성복을 읽는다. 집에서는 데리다와 들뢰즈를 곁에 두고 있는데 조금 읽으면 머리가 아파 하루키에게로 자주 도망을 친다. 화장실에서는 오 년 넘게 그 자리에 놓인 황동규 시선집을 쭈글쭈글해지도록 읽고 있으며(그런데도 그걸 통째로 외우지 못하는 내 메모리가 신기하다.) 근자에 차라투스트라를 옆에 뒀는데 변비를 염려해서 많이 읽지는 못한다.
얇은 시집들이 다수 포함됐지만 반 년 동안 대략 120권 정도를 읽은 것 같다. 사흘에 두 권.. 머리에 남은 건? 물론 없다! ㅎㅎ 그냥 스쳐 지나갔을뿐. 제가 필요할 땐 나오겠거니 생각한다. 앞으로 반 년 나는 또 어느 쪽으로 이끌려 가 무슨 책을 읽게 될까 궁금하다. 분명 내가 나서는 길인데 목적지는 알 수 없는,
이것도 여행이라면 여행 아니겠는가?
2020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