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넉 장의 흑백사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수많은 인용과 단상들로 뒤섞일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무시하고 내용은 형식에 의해 집결할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체'라고 명명되고 체의 글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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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두 딸의 고교시절 국어 선생님.
내가 아는 박정대 시인의 직업이다.
선생과 시인.
그나마 투잡으로 잘 어울리는 직업들이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직업이 삶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세상살이의 궁극적인 일이 사는 일이라면
모든 인간의 직업은 삶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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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사랑은 멀리서 젖고
나무들은 선 채로 외투를 털고 있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의 휘파람 소리가
환청처럼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구름의 휘파람 소리,
러시아 혁명사처럼 흐르던 한 떼의 구름이
허공에 인생 사용법을 쓰고 있다
계명을 몰라도
나는 휘파람을 불며
멀리에서 젖고 있는 그대에게
허밍의 세계사를 전해본다
그대의 머리카락이 떠받치고 있던 허공에서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견고함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두툼한 외투
외투 끝으로
손을 내밀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으면
세상의 한끝이 내 손 위로 내려와
차갑고도 부드럽게 녹는다
나는 손금을 따라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바라본다, 누운
물
사랑은 멀리에서 이렇게 나에게로 당도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다,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박정대 .문학과지성.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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