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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혼자 있어서 홀가분한 이 외로움,
외로움 아닌 것은 하나씩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속에 봉해뒀던 사람들은 기색이 안 좋지만
하나씩 말없이 나간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비울 게 없으면 시간이 휘는지
방금 읽고 덮은 휴대폰 전광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선창에서 배 하나가 소리 없이
집어등을 환히 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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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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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궁평항에서 하루 묵었다.
황동규 시집 한 권 들고 갔었다.
짐 내려놓고 바닷가에서 펼쳤더니
이 詩가 첫 쪽에 있다.
궁평 바다 저물녁에
황동규가 노래하는 궁평 바다를 읽는 일.
우연이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화장실 수납장에 6년 동안 놓여
수십 번 읽고 습기에 표지 다 찌든
황동규 시선집을 책장으로 옮기고
좀 더 얇은, 궁평항 같이 다녀온
또다른 황동규를 대신 놓았다.
임무교대.
둘다 시인의 시선집이니
담긴 詩는 그 친구가 그 친구다.
또 거듭 읽겠지. 몇 년.
시인은 자꾸 늙고
궁평항도 드문드문 찾을 수밖에 없겠지만
오래 그 바다와 처연한 노을과
시 한 편, 그리고 시인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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