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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 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난 시인의 詩를 읽는 일은
오래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일 같다.
시시껄렁하게 살다 가고 싶다던 시인은
마음대로 가셨는지?
적어도 그를 보내던 무렵,
내가 봤던 세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차분하고 조용한 신화.
그때 시인을 환송하는 플랫폼에는 그런 현수막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인은 낮게 웃었겠지만.
시인이 살아있을 때 이 시집을 읽었다면 아마 지금 읽은 느낌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30센티에 100년이라는 고고학의 시간, 시인이 걸은 직하의 시간에, 시각에 더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갔고 나는 이제야 읽었으니 내 읽기는 그의 죽음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시는, 예술은 그런 것인지 모른다.
발화되고, 인쇄되고, 배포되면 시인은, 시는 그 속에 고정되지만 시간은, 상황은 그 고정된 것들에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어 어떤 경우에는 처음과 전혀 다른 의미, 표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시집 속에 시인이 어떤 시인의 죽음을 생각하는 시가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그 시를 세 번 읽었다. 그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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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
그때 나 갓 스무 살
그 거리, 혼불이 든 영혼의 거리
그대를 기다렸네
내 옆에 보자기를 풀어 빗이나 실이나 단추를 팔던
아낙, 그때는 80년대
독재자의 얼굴로 돌이 날아가고
흰옷을 입은 여자들이 한 거리에서 춤을 추고
그대가 오던 길이 막히고
아낙이 젖 먹던 아이의 얼굴을 시커먼 손으로 훔처주며
고개를 숙일 때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며 시계를 바라보며
오후를 넘긴 해가 멀리 지구의 저 너머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때 내 영혼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대여, 이 속수무책은 그때 그 도시를 다스리던 독재자의 선물인가,
내가 그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느낌,
내 일생의 어떤 순간도 더 이상 기다림으로 허비하지 않겠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기다림을 거부하며,
어둑한 그 거리에서
아낙이 단 하나의 빗도 팔지 못하던 그 거리에서,
어떤 독재보다 더 지독한 속수무책은
내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검열했고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을 믿지 않는 것, 그때,
그대는 끝내 그곳에 오지 않고
지금 나는 사십이 되어 비 오는 이방의 어둑한 기차역에 서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오십 분 연착된다던 기차는 두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고
펑크 계집아이 하나가 맥주 하나 마실 돈 달라고 손 냉미는데
지금 이 속수무책도 그때 그 독재자의 선물인가,
나 그때 지금까지 당도하지 않는
그대를 기다려야 했는가
-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2003. 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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