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책과 문화 읽기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취몽인 2020. 8. 16. 12:21

인간과 말

훌륭한 책이 있다. 저자는 이미 죽었고, 책만 남았다. 어떤 경우 사람이 남은 것보다 책이 남아있음이 더 소중할 수도 있다. 많은 고전이 그렇다. 생각이 언어에 실려 시간 앞에 놓여진다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저자는 독일인이다. 독일어는 어렵다. 관념에 관한 한 특히 더 어렵다.

최고의 수요자가 최고의 상품을 창조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감사했다. 배수아라는 안목있는 수요자가 독일인의 난해한 관념을 유려하게 번역했다. 그가 아니었음 읽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피카르트의 대표작 '침묵의 세계'는 최승자시인이 번역했다. 그 또한 같은 경우다. 거듭 감사한다. 정신의 보물상자를 나눠주심에 감사한다.

말, 언어, 침묵, 음악, 그림, 詩.
피카르트는 이것들이 인간의 근원이라 말한다. 진리를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의 통찰은 그저 종횡무진 흐른다. 생각은 그의 글을 따라가며 그저 눈만 끔뻑끔뻑 한다. 그렇군, 그럴 수도 있군, 그럴수가? 그건 아니지, 그렇게 되면 좋겠네. 그러자..

나는 아직 피카르트의 통찰에서 멀다. 하지만 어슴프레 그 곳을 느낄 수는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금 더 이 바닥을 더듬으면 귀가 열리리라 기대한다. 책이 좋은 점은 그때까지 기다려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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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인간에게 미리 주어져 있다. 인간이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언어는 인간 속에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 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일인칭이자 동시에 이인칭이 된다 -야콥 그림.

진리는 진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과잉과 결부되어 있다. 진리는 과잉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함께 그에게 앞서 주어진 죽음을 죽는 것이다. 죽음이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은 개인을 기습하는, 훨씬 더 격렬한 사건일 것이다.

음악은 꿈을 꾸면서 비로소 울리기 시작하는 침묵이다. 그러나 음악은 말을 꿈꾼다. 음악은 말의 언저리를 꿈꾸며, 말을 위해서 꿈꾼다

인간이 말을 갖는 것은 인간이 이성의 섭리를 따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세상의 섭리가, 객체 속에 있는 섭리가, 인간의 사고를 돕기 때문이다. 객체는 인간과 더불어 사고한다. 객체는 인간의 발아래 굴복하지만, 그러나 인간과 함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사고할 뿐만 아니라, 사물로부터 사고되기도 한다.

현실의 세계와 시의 세계 사이에서 시인은 살고 있다. 그는 시의 세계를 대리한다. 그는 시의 세계를 위해 시를 쓴다. 시는 시인을 떠나 시의 세계로 가버리고 시인은 현실에 홀로 남는다. 두 세계의 가운데서 시인은 고독하다.

시인은 그에게 미리 주어진 시의 선험성으로 시를 쓴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시가 거기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시를 쓰기 이전 세계의 시다. 그 시가 시인을 향해 울렸고, 시인을 향해 시로 왔다. 시인은 자신의 시로 대답한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에게 미리 주어진 시를 현실로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