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 안도현 엮음

취몽인 2020. 10. 1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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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안도현시인이 엮은 책.
이 책을 언젠가 도서관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알라딘을 뒤지다 생각이 나서 내지가 누렇게 바랜 헌책을 다시 사서 읽었다.
당시 시인이 '젊은 시인들'이라 불렀던 장석남, 유하, 함민복, 나희덕 같은 시인들은 이제 환갑 근처에 서성이고 있다.
안목이 일천한 나 같은 얼치기는 고운 詩를 골라 떠먹여주는 이런 시집이 좋다. 한 치의 수고도 없이 호사를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시인이 고른 72 편의 詩 중에서 한 편을 굳이 골랐다.
내가 어디로 끌리는지 나중에 확인해볼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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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김명인<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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