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앵무새의 혀 / 김현 엮음

취몽인 2020. 10. 25. 17:03

.
.
현대사 연구 2
- 어떤 대화

선생님, 저는 81학번이에요
선생님 시대의 희생타지요
우리는 자율성을 알지 못하거든요
학생 운동은 쭈쭈바이구요
어른들은 그늘에 앉아
땀 식히며 쭈쭈바 빨지요
거대한 공백기
80년대는 공백기 아닌가요, 왜
대형 사건들은 비석만 세우고
지식인 사회는 이빨만 쑤시죠?

칠십년대는 다른 시대였어요
길가는 사람들을 꿈틀이게 했구요
잠자는 사람들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며
일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푸른 못 하나씩 자라나게 했지요
가슴에 못 하나씩 자라나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비틀거렸지요
아, 나도 푸른 못 하나로 비틀거렸다가
행선지 밖으로 밀려나버렸죠
그러나 팔십년대는 달라요 아
다르지요
우리는 지금 줄 안에 있거든요
다만 줄 안에서 춤을 추지요
비틀거려서도 뾰족해서도 안 돼요
줄을 넘는 게 반역이라면
줄을 이탈하는 건 불온이란 말 말입니다
독 안에 든 쥐
한번쯤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 고정희

-------------------------------

이 독특한 시집은 문학과지성사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1985년 발간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24명의 시인들의 신작들을 김현선생이 골라 엮었다.

1985년,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해이다. 세상은 군부독재에 짓눌려 있었지만 살림은 어찌됐건 좀 나아지는 시절이었다. 맥 빠진 데모는 여전히 이어졌지만 아직은 70년대 그 치열함의 동력을 도무지 회복하지 못했고 다만 안으로 에너지를 조금씩 응축해가던 시절. 나는 겨우 24살의 나이로 잘 나가는 대기업 기획조정실 계장의 삶을 낯설게 살고 있었다. 월 40만원의 고임금을 받으며.

35년전 신작 시를 발표한 시인들의 면면은 대단하다.
몇몇 모르는 시인도 있지만 대부분 현재 우리 詩 바탁의 탁월한 기성이라 불리는 분들이다. 아직 안도현, 장석남 같은 시인들은 존재가 미약했던 시절, 김현 선생이 선택한 24인의 시인들은 우리 현대시의 줄기 같다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한 권 시집 안에서 그 줄기를 더듬는 느낌은 특별하다. 그리고 김현선생의 오래 전 안목을 보는 것 또한 더한 즐거움이다.

100여편 시 중에서 고정희시인의 시를 고른 이유는,
함부로 한 편을 고르기 힘든 주제와 더불어 내가 81학번이기에, 그 시절 청춘 한 가운데 섰던 당사자이기에 내 목소리도 조금은 담겼다 싶어서이다.


- 1985.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48.

'이야기舍廊 > 詩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손택수  (0) 2020.10.27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0) 2020.10.26
두고 온 시 / 고은  (0) 2020.10.23
로르카 시선집 / F.G.로르카  (0) 2020.10.20
악의 꽃 / 보들레르  (0) 2020.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