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두고 온 시 / 고은

취몽인 2020. 10. 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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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있어야 할 날들이었다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고
이 누리 앞과 뒤
그렇게 있어야 할 날들이었다
한밤중 주린 배로 가는 길
꺼져가는 불빛 하나씩
나눠 가졌다
무엇이고 살아남은 자의 것이었다
가책도
죽은 자에 대한 기억도
개 같은 의무들도

전체도
개인도 그 다음은 똑같이 지옥의 길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있어야 할 날들이었다
긴 밤 지나
대낮은 얼마나 허망한가
사과밭이다

사과꽃이 피었다
참으로 먼데까지 왔다
9만 마리 10만 마리 되새떼가
커다란 벙어리 덩어리로 날아올라
무수한 이단으로 뒤집혀 회오리쳤다
그러자마자
지난날 항쟁의 밤같이 박수소리가 살아났다 온통 하얗다

진리 이후에는 다른 진리가 있다
사과꽃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라
천년의 관습
천년의 확신
천년 이상의 지루한 시간이 네 적이다

누가 미래를 다 차지하려고 노래하는가
사과꽃이 일제히
바람에 날리고 있다
아 그렇게도 꿈꾸던 자유는 낙화였구나
활짝 열려
열리자마자 쾅! 닫혀
흩어진 자의 꽉 찬 고독들
저물어버린 하늘 속에서 떨고 있다
이 세상에는 더 많은 미지의 암흑이 있어야 한다
밤이 도둑처럼 왔다
별빛 아래
저쪽까지 밤새도록 사과밭이다

사과꽃 졌다
사과꽃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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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시인, 노벨문학상 후보로 늘 거론되는 시인, 출가와 환속, 혁명과 자유, 만인보 등으로 한 세상을 시로 살아온 시인. 최근엔 특유의 만용과 분방함으로 곤혹도 치른 시인..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고은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은 적이 없었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손이 가지 않았다. 그저 여기저기 신문이나 문예지 등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이 낡은 시집은 내 책장에 꽂힌 수 백명 시인들 틈에 자리잡을 것이다. 아마 구상 시인 앞자리쯤 되지 않을까? 먼저 서있던 시인들은 뒤늦게 온 거장을 어찌 생각할까? 저 뒤에 있는 최영미시인은 또 뭐라 할까 이래저래 궁금하다.

- 2002.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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