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가만히 사랑을 바라보다 /문태준 엮음

취몽인 2020. 11. 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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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이루는 말들 / 김소연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을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 손끝에서 빠르게 녹슬어 간다

너의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상어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은 나무의 유일한 전술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는
나무 밑둥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고 하자
동면에서 깨어난 허기진 첫 식사라고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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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부러운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이 詩를 읽으면서는 여성의 감성이 부럽다. 이유는?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이다. 그렇다.

좋은 詩를 모은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아래쪽 책갈피를 접어둔 詩가 열 편쯤 된다. 그 詩들을 다시 읽고 이 한 편을 골라 옮겨 담는다.

그 밖에 40일전쯤 떠난 어머니 생각을 하게하는 詩 한 편 더 옮긴다. 창밖에 서성이고 계신 것 같아 몇 번 고개 돌려본다. 立冬 다음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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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至 다음날 / 전동균

1.
누가 다녀갔는지, 이른 아침
눈 위에 찍혀 있는
낯선 발자국

길 잘못 든 날짐승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간 흔적 같기도 한

그 발자국은
뒷마당을 조심조심 가로질러 와
문 앞에서 한참 서성대다
어디론가 문득
사라졌다

2.
어머니 떠나가신 뒤, 몇 해 동안
풋감 하나 열지 않는 감나무 위로
처음 보는 얼굴의 하늘이
지나가고 있다

죽음이
삶을 부르듯 낮고
고요하게

-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 밥은 굶지 않는가?
- 아이들은 잘 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