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합장 合葬
얼갈이 배추 석 단을 다듬고 나니
버려지는 겉잎만 한 무더기다
흙 헤집고 버둥거리다
등뼈 휘고 기운 소진한 떡잎의 최후가
날짜 지난 신문지 활자 위에 수북하다
패이고 깎여 벌겋게 덧난
놈의 이마를 가만 짚어본다
첫 마음은 순정해서 깨지기 쉬운 거라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은
외로운 거라고 위로하는데
생애 처음 마음에 사람 하나 품고
휘청대던 기억 아직 또렷하다
버려진 것들을 쓸어모아
꽃 진 모과나무 둘레에
구덩이 얕게 파고 묻는다
꼬 깨지고 귓불 떨어져나간
초록 깃발의 꿈을 한데 모신다
-손세실리아 . 애지. 2006.
------------------------------------------------------
첫 시집을 낼 무렵 시인은 호수가에 살았나 보다. 그 일산 호수가에서 갠지스강을 그리워 하는 시인의 말이 있다. 그리고 지금 시인은 제주에서 살고 있다.
호수와 강 그리고 바다에 시인은 있다.
페이스북 친구인지라 처음 읽는 시집도 처음 시인도낯설지 않다. 하지만 詩들은 낯설다. 물 냄새 나는 보들보들한 詩를 상상했지만 굳은 살 박힌 손마디의 詩가 곳곳에 있다. 생활에, 정의에, 자연에게 보내는 시의 옹이들이 깊다. 세실리아라는 시인의 고운 이름 뒤에는 얼핏 바닷가 사내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광장의 고함도 들린다.
그리고 제 할 일 다한 푸성귀 겉잎이나 콩 만한 나방을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제일 큰 목소리도 들린다.
강, 호수, 바다가 다 출렁거린다.
'이야기舍廊 > 詩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가 태어나는 자리 / 황동규 (0) | 2021.02.25 |
---|---|
서정시가 있는 21세기 문학강의실 (0) | 2021.02.24 |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 신경림 엮음 (0) | 2021.02.15 |
와온바다 /곽재구 (0) | 2021.02.13 |
어떻게든 이별 / 류근 (0) | 2021.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