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2습작

혈거시대

취몽인 2022. 2. 14. 11:38
.
혈거시대


몇 평 동굴은 깊다
부숴진 문을 당기면
삭아 문드러진 시간들이 흘러나온다
꺾여진 신발 두 켤레 아무렇게나 놓여있고
인기척은 없다
문간에 사내 하나 잠들어 있다
사지가 익사체처럼 퉁퉁 불었다
반쯤 떨어진 퇴적이 덜렁거리는
암갈색 벽을 돌아가면
사라져가는 원형도 하나 누웠다
도무지 오지 않는
기척으로만 얼씬대는 어느 때
떠지지 않는 눈으로 짐작만 할 뿐
해야할 일은 없다 이 굴혈에서
가뿐 숨을 내쉬면 어둠이 조금씩 새어나와
구석이 점점 더 깊어지는 곳으로
발을 딛는다
검은 박쥐 한 마리 어깨를 치며 달아나고
잠시 멈춘다
다시 가라앉는 어둠속 저 곳
오도가도 못하는 나의 폐사지 있다
촛불 하나 켜지 못하고
그저 널부러져
멸망을 기원하는 어둠 하나
고스란히 누워
우는 듯 웃는 듯 나를 보고 있다


200702


'詩舍廊 > 2022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없는 길을 걷는 일  (0) 2022.02.14
내가 아직 자라는 이유  (0) 2022.02.14
몽상 210428  (0) 2022.02.14
개장2  (0) 2022.02.14
남은 오월  (0) 2022.02.14